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땅이름

목포시가지의 형성(1)

작성일
2024-12-31
조회
37


▣목포시가지의 형성Ⅰ
1897년 개항당시의 목포는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촌면 목포리의 목포진(남평리, 서평리)과 쌍교리(雙橋里)부근까지의 90여호에 불과하였다한다. 그러나 1897년 10월 16일 조선외부대신과 일본, 미국, 불란서, 독일, 영국, 로서아의 각 대표사이에 서울에서 조인된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의하여 각국거류지가 동으로 송도(松島;동명동 어판장 부근), 남으로 목포진(만호동), 북으로 노적봉, 서로는 서산동 어항에 이르는 임해지역으로 정해져 전 계획구역이 726,024㎡이었으나 나중에 방조제의 구축 등으로 998,082㎡로 늘어났다.
각국거류지회는 네덜란드인 스타덴에게 각국거류지의 시가지계획을 작성시켜 폭이 8m, 10m, 12m, 15m의 도로와 각국영사관, 세관, 공원부지 등 325,713㎡를 제외한 672,369㎡의 택지를 다음과 같이 A, B, C의 3지구로 구분하여 순차공매하였다.


A지구 - 종별; 草地, 水田 등으로 高潮位上에 있는 평탄한 低地部
지구; 本町(중앙동) 京町(경동) 仲町(중동) 錦町(금동)의 전부와 大和町(대의동)福山町(복만동) 常盤町(상락동) 務安通(무안동) 港町(항동)의 일부
면적; 112,700㎡
B지구 - 종별; 언덕, 산비탈, 경사지
지구; 山手町(유달동) 木浦台(만호동 언덕) 霞町(측후동)의 전부와 旭町(서산동)大和町(대의동) 務安通(무안동) 常盤町(상락동) 福山町(복만동) 松島町(동명동)港町(항동) 櫻町(금화동)의 일부
면적; 342,815㎡
C지구 - 종별; 바닷가 갯벌로 매립을 하여야 할 지역
지구; 曙町(광동) 祝町(축복동) 寶町(보광동) 幸町(행복동) 榮町(영해동) 壽町(수강동)海岸通(해안동)의 전부와 松島町(동명동) 常盤町(상락동) 福山町(복만동)港町(항동) 櫻町(금화동) 旭町(서산동)의 일부
면적; 216,854㎡


공매는 100㎡(약30평)에 대한 공정원가(갑지구 은화 6$, 을지구 은화 3$, 병지구 은화5$)을 정하여 경매에 의하여 개인에게 불하하여 개인이 매립을 하여 부지를 조성하였으며 시가지의 대부분이 거주용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시가지 확장은 방조제 축조와 간석지의 매립으로 이루어졌다. 거류지 내의 방조제는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의하여 한국정부가 1898년 6월부터 설계, 공사방법 등을 거류지회와 절충하고 당시 총세무사인 영국인 브라운이 관리하던 세관보관금으로 1899년 6월 11일 기공식을 가져 1901년 5월 서산동에서 목포진, 송도를 거쳐 목포역 부근까지 가설공사를 합쳐 약 1.5㎞의 공사를 마쳤다.
그 후 붕괴함몰된 부분과 처음 공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부분을 보수하여 1909년에 매축을 완공하였다.
각국거류지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간척과 매립으로 조성된 곳을 집중 개발하여 모든 도시기반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거류지(쌍교동, 온금동 등)는 도로 등의 기본적인 시설조차 하지 않았으며 각국조계지장정에 의하여 한국인은 거류지 내에서 살수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각국거류지 밖에서 조밀하게 살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구획은 1899년 이 지역의 행정을 위임받은 각국거류지회(신동공사:紳蕫公司)에서 정하였다. 각국거류지는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町”과 “通”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생겼다. 한편 한국인 마을의 동명은 쌍교리(雙橋里) 온금동(溫錦洞) 연치동(鳶峙洞) 등이었다.
최초의 도로는 목포진의 북쪽에서 무안통 방면의 길이 220m의 도로가 측량기사 스타덴에 의하여 축설되었고 다음으로 구 경찰서(현 초원관광호텔)를 중심으로 한 십자도로 690m의 도로가 축조되어 시가지를 7개구역으로 나누어 동명을 정하였다. 해벽공사용 토사를 운반하던 영사관(현 목포문화원) 밑에서 해안에 이르는 연장 600m의 도로와 이와 직각으로 경동에서 교차하는 290m 도로와 수강동, 영해동, 행복동 등의 합계 600m의 도로가 순차적으로 축조되었다. 또한 1909년 목포-광주간 86km의 도로가 개통되었다.
1910년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국권을 빼앗긴 한반도는 일본의 소비시장과 식량기지가 되었다. 식민정책 아래서의 목포항은 수탈항구로서 무역량의 급격한 증가를 보였는데 수입보다는 수출이 2배 가까이 많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수출의 주요품목으로는 쌀, 면화 등이며 수입은 철도공사자재와 비료 등이었다.
1914년에는 신부제(新府制;1914. 4. 1 總督府令, 제111호)에 의하여 목포가 무안군과 나뉘어져 각국거류지역과 부내면 일부를 관할지역으로 축소지정하여 현재의 목포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일 신부제 실시 후 총독부 토지조사반의 목포시가지 조사에 따라 12월 9일 전라남도고시 제42호로 관할구역의 동명을 개정하여 33정동(町洞) 53구획으로 정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의 목포부) 일본인의 급증은 조계지역 외로의 시가지 확대를 초래하였고 특히 항만과 연계된 광주․목포간의 일등도로(국도 일호선)의 개통, 호남선 철도개통(1914)의 영향으로 서산동 지역이 개발되어 죽동에 있던 유곽이 櫻町(금화동)으로 옮겼고 온금동의 어항(째보선창)의 축조와 남교동(수문통거리)의 매립으로 시가지가 확장개발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남교동, 양동의 매립에 이어 역전의 호수가 매립되었으며(1928~1930) 정병조 방조제[철도기관고~장도(長島, 진섬; 왕자회사 자리를 잇는 550m의 방조제)]와 죽교리(뒷개)에 750m의 방조제를 수축하여(1925년) 시가지의 팽창에 대비하였다.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大正町(대안동) 昌平町(창평동) 明治町(명륜동)의 도로망을 바둑판형으로 개설하였으나 한국인 거주지역은 거의 도로개설을 하지 않았다.
목포는 지형상 식수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도시의 팽창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입출항하는 선박이나 공업용수 등에 고심하다가 1908년 무안군 이로면 상리 대박산(大朴山)의 골짜기(현재 상동 목포실내체육관 아래)에 제1수원지와 온금동 유달산 골짜기(현재 목포제일여자고등학교 뒤)에 제2수원지의 축조를 기공하여 1910년 5월에 준공 통수하여 각국거류지(일본인거류지역)에만 공급하였다. 그러나 한일의 합방으로 일본인의 입주가 증가하고 거주지역이 확장하면서 도저히 수요에 따르지 못하여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군산동) 국사봉 산록의 계곡에 제3수원지를 축조하기로 하고 1914년 4월 기공 1916년 4월 준공 통수하였다. 그러나 이 저수용량으로도 수요수량이 공급량을 초과하여 1926년 제3수원지의 옆에 제4수원지를 축조하여 1928년 준공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거주지역의 공설수도에는 물통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1933년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에 제5수원지 공사를 기공하여 1937년 3월에 준공하였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이로면 죽교리, 산정리, 용당리의 일부를 편입하여 죽교리, 산정리, 용당리를 신설하였다.
1935년에는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전국적인 도시화의 진행으로 목포도 많은 인구의 증가를 보여 인구 6만으로 전국6대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광복 후 해외로부터의 귀국, 6.25동란으로 인한 피난민의 유입, 농촌의 피폐화에 따른 도시진출 등으로 인구는 증가하는데 반해 시가화 구역이나 도로망은 거의 그대로였다. 1949년 일본식의 ‘町’과 ‘通’을 모두 ‘洞’으로 개정하고 1953년에는 목포시의 동의 명칭과 구역을 전면개정하여 시행정의 편리를 위하여 ‘행정동’과 부동산, 호적 등 법적인 효력을 갖는 ‘법정동’을 구별하였다. 삼학도의 축항공사는 1955년에 UNKRA 등의 동의를 얻어 착수하였으며 삼학도와 송도(현 동명동어시장)의 연륙공사는 연장 370m 폭 14m에 철도와 도로를 함께 건설하여 1965년에 완공하였다. 한편 목포시에서는 지금의 남해개발지구를 조성하기 위하여 松島~삼학도~입암산간 방조제공사를 구상하였다. 이 공사는 1962년 9월 5일 착공하여 1973년 6월 30일 제방을 완공하여 60여만평의 택지를 조성할 계획이었다.
1963년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상리, 용당리, 달리, 눌도리가 목포시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목포시의 행정구역이 총 23,19㎢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로동과 충무동이 신설되었다.
1965년 이전의 목포-광주간 도로는 유달산우체국(국도1호선기점)~목포역~산정초등학교 앞~목포상업고등학교 앞~용당아파트 앞~목포대학교 용해캠퍼스 앞~목포이로초등학교 뒷길~상동을 거쳐 광주로 가는 도로였다. 그러나 교보생명 앞~용당동 목포MBC 앞으로 통하는 폭 30m 연장 2,5㎞의 도로가 70년에 완공되어 광목간 고속화도로와 연결되었다. 매립지인 용해용당지구(1925~1932)의 개발이 본격화(1968~1975)되었으며 토지구획정리사업(1차 1965~1970. 241㏊, 2차1968~1974. 253㏊)을 하여 인근지의 민간개발을 유도촉진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남해개발지구가 69년 건설부 공업단지심의회에서 공업단지로 지정되었으나 76년 6월 IBRD주택단지로 되어 주택지 조성사업에 의해 착공되어 77년 6월에 분양되었다. 1970년 말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목포공업단지 조성공사가 상동과 석현동에 걸쳐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남쪽단지와 북쪽단지로 분리되어 조성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를 병합하여 행정구역이 25.96㎢가 되었으며 76년 건설부에서 고시된 도시계획구역은 33.19㎢이었다.
하당지구가 68년 10월 대한준설공사가 공유수면매립면허를 받아 69년 6월 방조제축조공사를 착수하여 72년 6월 완공하였다. 온금동의 째보선창을 매립하였으며(1981년) 북항개발공사를 착수하였다.
일단의 주택지조성사업(남해개발지구, 죽산개발지구)을 행하였다. 죽산단지개발로 주거지는 전면적으로 확산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목포시에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침수현상이었다. 지반의 높이가 해면보다 낮은 곳이 많고 유수지(溜水地)가 부족하여 배수로가 완비되지 못하였고, 영산강하구둑 공사로 인하여 선창가의 영해동, 항동 일대가 한달에 1~2번 해수에 의한 침수가 일어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81년 12월에는 “汎市民的으로 개발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유달산공원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공원개발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목포시는 유달산공원화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불량주택을 이전하고 순환도로를 개설하였으며 관리직제를 개편 공원관리사무소를 설치하였고 갓바위공원개발계획을 수립하여 해양박물관, 향토문화관, 예술회관 및 편익시설, 운동시설, 보트장, 요트장을 설치한다고 계획하였다. 80년대 후반 목포인근에 대한 시가지 개발압력이 높아지고 있어 가용지가 많은 목포시 행정구역내 외곽지의 개발을 추진함은 물론 행정구역 밖의 개발을 위해 무안군, 영암군 등과의 통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영암군 삼호면과의 통합 움직임은 목포시측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삼호면 측의 조직적인 반대운동으로 무산되었다. 또한 목포와 인근 군지역간의 통합움직임은 2차례에 걸쳐 주민조사를 하였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첫 번째는 목포와 무안군 지역의 주민조사를 하였는데 무안군 측의 불공정행위가 드러나 재조사를 하였으나 무안군민의 반대로 부결되었고 2차는 목포시와 무안군, 신안군까지를 통합하려 하였던 것으로 목포시 주민과 신안군 주민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무안군 주민의 반대로 역시 부결되었다.
유달산의 공원화사업으로 국내 최초로 야외조각공원이 개관되었고 난전시관이 개관하였다. 갓바위공원화사업으로 남농기념관, 목포향토문화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목포문화예술회관 등이 개관되어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다.
1995년에는 하당신시가지 개발사업이 완공되었고 신시가지 2단계 매립사업이 완공되어 평화(미관)광장이 조성되었다. 한편 산정동 북항지구에 농공단지를 조성하였으며 삽진농공단지를 조성하여 수산물과 조선 등의 업체가 입주하였다. 목포의 재해는 거의가 만조시 해수가 역류하여 일어난 수해였다. 또한 영산강하구둑 축조 이후 목포내항연안의 일부 저지대가 조위상승으로 상습적 해수피해가 발생하여 배수펌프장 및 유입관로, 고지배수로 등을 설치하였다.
한편 광복 이후 도심부주변에 형성되기 시작한 불량주택 밀집지구가 ‘도시저소득 주민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임시조치법(1989, 1999.12.31한 적용하는 한시법)을 적용, 지역내의 건축물의 개량, 공공시설의 정비 등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미로처럼 얽혀있던 골목길을 정비하고 소방도로를 개설하여 주거밀집지역의 숨통을 트이게 하였다. 2000년 3월 동사무소 기능을 주민자치센터로 운영하였고 삽진산업단지 매립과 신도심 2단계 택지개발사업으로 목포시의 면적이 47.06㎢가 되었다.
목포의 도시화가 시작된 것이 1897년 개항이후부터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각국거류지를 주축으로 도시계획이 수립되었고 거류지내의 거류자가 일본인이 대부분을 점하여 일본인을 위한 도시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거주지역은 정돈된 거리와 상하수도 시설에서 가로등까지 구비하였으나 한국인 거주지역은 도로나 상하수도 등이 완전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지적(地籍)이 확정되지 못하여 조밀하고 무질서한 가옥의 배치는 새로운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각종개발사업을 추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지 1세기가 지난 지금, 신시가지의 조성과 도로교통망의 확충, 불량주택의 정비, 철도의 복선화 등은 환황해권, 서남해의 관문으로서의 새목포로 발돋움하는 희망에 차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