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땅이름

대성동

작성일
2024-12-31
조회
33


▣대성동
대성동은 본래 무안군의 부내면 지역인데 연치동의 연산배수지(一本松配水地)일대를 정상으로하여 남서향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지역으로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개항후 신작로(新作路;국도1호선, 당시는 광목간 도로라 하였다)가 뚫리면서 새로이 번창한다는 뜻에서 번창동으로 불리웠다가 다음에 신창동으로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연치동, 신창동, 북교동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성한다는 뜻을 따서 대성동이라 하여 목포시에 편입되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목포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체 25동중 제5동이라 칭하였으며 1953년 8월 15일 지방자치실시로 대성1구동, 대성2구동으로 나뉘었다. 1969년 내무부 지역개편으로 대성1동, 대성2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97년 1월 1일 목포시 행정동 분․통합으로 대성 1․2동이 대성동으로 합동 개편되었다.


■나무장터(장텟거리, 장터거리, 신창동장터)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차로 부근, 교차로를 넓히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뻘바탕
대성초등학교 일대와 노인복지회관 서쪽의 개펄땅을 뻘바탕이라 하였다. 특히 목포에서 간석지가 많아 뻘바탕이라 불리는 곳이 여러곳이 있어서 앞에다 동명을 붙여「대성동뻘바탕」「연동뻘바탕」 등으로 불렀다.


■솔갯재(연치동)
대성동에서 산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솔개재라 불렀다. 우리말을 한자로 고쳐쓰면서 솔개鳶 언덕峙자를 써서 마을을 연치동이라 했는데 지금의 대성동 우체국앞에서 연산배수지를 지나 산정3동으로 넘어가는 길인데 지금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솔개재는 옛날에 (국문효수하던 자리로서) 사형집행장이었다고 한다.
노송이 우거진 숲사이에서 집행인인 망나니는 사형수를 꿇어 앉혀놓고 술을 마시고 또 그 술을 칼에 뿜어내기도 하며 널레널레 춤을 추다 말고 칼을 내리치면 목이 달아난다. 그러면 그 목을 나무에 매달아 효수를 하는데 그러면 솔개들이 모여들었다해서 솔개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또 그 망나니를 이곳에서는 「해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본송배수지(一本松配水地)수도방죽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국사봉 기슭에 있는 저수지에서 오는 송수관이 대성동 일본송배수지(연산배수지의 서쪽 아래)로 들어와 시내로 배수된다고 하였다. 지금은 가동하지 않고 있다.


■연산배수지(연산저수장, 솔갯재배수지, 솔갯재방죽)
목포 상수도 시설이 이루어지면서 솔개재에 배수지를 설치하였는데 이 배수지를 연산 저수장, 솔갯재 배수지, 솔갯재 방죽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가동하고 있다.


■수도방죽
솔갯재 배수지 부근에 있는 마을


■신창동(新昌洞)
광목간 도로가 뚫리면서 새로 생겨난 마을을 신창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대성동으로 흡수되어 마을이름이 없어져 지금은 이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영덕이 배추밭
지금의 대성초등학교 일대의 배추밭을 영덕이 배추밭이라 불렀다. 원래 뻘바탕이었는데 정병조씨가 재판을 통해 일본인들이 차지하려는 것을 빼앗은 땅인데 당시 재판소에 근무하는 구(具)주사라는 사람이 정병조씨의 재판에 많은 협조를 해주어서 그 은혜로 그 땅을 구주사에게 주었고, 구주사는 같은 친목계원인 김영덕씨에게 주었다한다. 그 후 이 땅에 배추농사를 지었는데 규모도 크고 생산량도 많아서 영덕이 배추밭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다.


■피병원(避病院)자리
지금의 노인복지회관자리에 피병원(대성원)이라는 법정전염병의 격리병동이 있었는데 이는 1898년 일본인들이 설사환자가 발생하여 환자를 일반인과 접촉을 피하게 하고자 무안동의 산기슭에 세웠으나 시가지의 팽창 등으로 1900년 지금의 서산동 뒷산으로 옮겼다가 부지가 개인에게 불하되자 녹십자병원 부근의 바닷가에 옮겼다. 그러나 여기도 호남선 철도의 목포정거장 부지와 가까이 있어 1912년 연치동(현 대성동)의 서북단 적은 반도의 언덕에 세웠던 것이다. 1962년 이 자리에 결핵병원이 외국인에 의하여 설립되어 운영하다가 국립결핵병원으로 개편하여 석현동에 병원을 신축 이전하였다.


■산정동 성당
대성동천주교회보다는 산정동성당으로 더 잘 아려진 천주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자리가 카톨릭병원 주차장이 되었으며 그 아래 동남쪽으로 하얀 십자가(1913년 건립, 길이 18척 가로 7척8촌)가 목포시내를 내려다보고 세워져 있었다. 이 성당의 서북쪽에 있던 사제관의 운동장 자리에는 1955년에 세워진 카톨릭병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에는 산정동천주교회가 새로 지어졌다. 지금 남아있는 사제관은 1934년 처음으로 교구가 발족되면서 설립된 것이다.


■오동나무 거리
솔갯재 서쪽에 있는 마을. 부내면 연치동을 말하는데 대성동 동사무소 앞에서 산정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오동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오동나무 거리라 하였다한다. 그 골짜기를 넘어가면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사람이 죽어서 오동나무 거리를 지나면 마지막이라 하여 마지막 가는 길을 「오동나무 거리를 지나갔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목포공립상업학교
1920년 4월 지금의 대의동에 있었던 거류민단사무소에서 한․일인 공학의 고등소학교 졸업자를 입학자격으로 하는 수업년한 3년의 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1922년 대성동에 터를 잡아 1600평의 부지에 145평의 교실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목포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
1939년 교사를 용당동 현 교사로 신축이전하였고 이 자리에는 1942년 목포중학교(5년제)가 설립되었다. 목포중학교는 목포고등학교로 개편되어 용당동으로 신축이전하였고 목중고와 교사환치로 지금은 목포여자고등학교가 들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