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땅이름

남양동

작성일
2024-12-31
조회
26


▣남양동
남양동은 목포의 중심상권인 남교동과 주거지역인 양동이 합동한 곳으로 남교동은 무안군 부내면의 지역으로 수문통거리를 중심으로 쌍교(雙橋)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남교동이라 칭하여졌고 양동은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陽)동 또는 서양인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양동이라 불리었는데 1997. 1. 1. 목포시 행정동 분․합에 따라 남교동과 양동을 합동하여 양동으로 칭하다가 1997. 7.21 행정동 명칭을 남교동의 ‘南’자와 양동의 ‘陽’자를 따서 남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12. 신부제(新府制)실시로 양동, 남교동이 신설되었고, 1932년 8월 부제의 확장으로 양동, 남교동의 법정동이 신설되었으며 1953년에는 행정동과 법정동의 분리로 행정구역을 개정하고 1997년 1. 1. 목포시 조례에 의거 남교동과 양동을 합하여 양동으로 칭하고 법정동인 남교, 양동, 대성동 일부를 관할하였다. 1999년 5월에는 목포시 규칙 제1289호에 의하여 기존의 19개통 82개반을 12개통 50개반으로 조정하였다.


▣남교동
유달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지금의 북교초등학교 위쪽으로 해서 큰샘거리로 내려오는 시내가 하나 있었고, ‘문화의 집’ 골짜기에서 북교동 성당 옆으로 내려오는 시내가 있었는데 여기에 다리가 있어 북쪽에 있는 다리를 북교라 했고 남쪽에 있는 다리를 남교라 했는데 이 다리 이름을 따서 동명으로 했다한다.


■불종대거리
북교초등학교 아래 다리가 놓여있어 이 다리의 북쪽을 북교동이라 했다. 신안군청입구와 북교동성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북교동과 남교동에 걸쳐서 광장이 있었는데 이곳에 불이 나는가 망을 보는 철탑으로 된 망루(望樓)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불종대거리라 불렀다. 이 거리에서는 날마다 간이 장이 섰는데 이곳을 쌍교근방에 서는 장이라 하여 쌍교장터(쌩기장터)라 하였으나 1970년대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불종대도 철거되어 없어졌고 장터도 전설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또 ‘쌩기장터’앞에는 속칭 「조동이 도개집」(趙贊卿酒造店)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보통학교 분교실’이 있었는데 한국사람만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인 사설 「목포심상중학원」이라고 하는 말도 전해진다.


■고무공장자리
지금의 목화아파트 자리가 고무공장, 또는 경성고무자리이다.
1925년에 자본금 30만원으로 조선인들에 의해서 설립된 동아고무주식회사의 공장으로 종업원 약200명이 1년에 40만켤레의 고무신을 생산하였다.
광복후에는 경성고무로 합병되어 “만월표”고무신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질기고 편리한 화학제품의 신발이 나오면서 판로를 잃고 문을 닫았다.


■목포양주주식회사(삼학양조주식회사의 전신)
남교동파출소 뒤쪽에 1929년에 한국인의 자본으로 세워진 주조장(사장 김상섭, 전무 차남진)이었다. 광복후 삼학양조주식회사(사장:김상두)에서 승계하여 어려운 시절 우리의 시름을 달래주던 삼학소주의 본산지가 되었다.


■수문통거리
남교동 전 중앙공설시장에서 북교초등학교로 나가는 길을 수문통거리라고 했다. 이 일대가 매립된 것이 1925년경으로 그 이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으로 매립을 위하여 제방을 쌓으면서 수문을 만들었다가 완전히 매립되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수문이 있던 자리를 수문통거리라고 했던 것이다.


■청년회관자리
신안군청 앞에 있는 임마누엘 목포제일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옛 목포청년회관으로 1925년에 건축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1930년대를 전후한 목포청년운동의 보금자리로서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어진 역사적인 자리이다.


■양동 육거리
양동 높은 언덕에 많은 집들이 들어서 길이 여섯갈래로 나뉘어 생기면서 육거리라 하였는데 소방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졌으나 지금도 이곳을 육거리라 부른다.


▣양동(陽里, 羊里)
본래 무안군 부내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양형국으로된 산밑이 되어 양리(羊里) 또는 양동(羊洞)이라 불리었다고 하고 또 양동이 남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바닷가로 이어진 양지바른 곳이라 해서 볕양자를 써서 양동이라고 하였다한다. 또 개항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서양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양인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큰샘거리
육거리 남쪽에 있는 큰 샘이 있던 곳을 큰샘거리라 한다.


■기와가마(지와가마)
대성동과 양동의 중간에 기와를 구웠던 가마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양동우체국과 순천당 약국의 부근이다. 전에는 뒷개를 목끝에라고 불렀는데 목끝에 가는 길목에 지와가마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