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땅이름

무안동

작성일
2024-12-31
조회
33


▣무안동
무안동이란 동이름은 일본인이 각국거류지에서 무안으로 넘어가는 마루터기(기업은행앞에서 목포극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안통(務安通;일본인은 사람이 지나 다니는 길, 거리를 ‘通’이라고도 한다)이라 하여 이 근방을 무안통 1정목(丁目)에서 6정목까지 구분하였다가 조선총독부토지조사국에서 목포시가지를 조사하여 각국거류지 및 목포부 부내면의 동․정명을 정하면서 ‘무안통’으로 정하였다.
1948년 4월 1일 왜식동명변경에 따라 무안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실시에 의하여 무안동회가 되어 무안, 측후, 상락의 3동을 관할하였다.
1997년 목포시 행정동 분합에 따라 인접동인 호남동, 죽동, 무안동을 합하여 행정동명을 무안동이라 하였다.
무안동은 목포관내에서 유일하게 무안땅이었음을 나타내는 동이름이다. 무안이라는 지명도 삼국시대에는 물아혜(物阿兮)라 하였다. 물아혜는 이두식 표기로 “물아래”라하여 물아래 땅으로 영산강 아래 땅이라는 뜻이 된다고 하겠다.
목포는 옛날 무안군 이로촌면 목보리였었다. 목보리는 만호진이 있었던 지금의 만호동 언덕(만호대, 또는 목포대라고도 하였음)이었으며 진영내에 군졸들의 주거지로 서평리, 남평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측후동
목포부 각국거류지 지역으로 유달산 등구에서 유달산으로 올라가는 좌우이다. 1913년 12월 목포각국거류지 및 목포부 부내면의 동명을 정할 때 무안통의 5․6정목의 일부를 하정(霞町)이라 하였으나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을 변경할 때 노적봉 옆에 측후소가 있었는데 측후소 밑에 있는 곳이라 하여 측후동이라 하였다한다. 일제시 하정(측후동)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목포지점 직원관사가 있었고 일본인들의 사찰인 정토사와 일본인만이 다니던 명조유치원 등 일본인들의 주거지였다.


◎상락동
일제시대의 상반정(常盤町)을 1948년 고쳐 부르게 된 곳이다.
이곳은 목포의 서남쪽 갯벌 즉 송도(松島;지금의 동명동 언덕)에서 목포역쪽으로 매립하여서 생긴 동해안통 3ㆍ6정목 일부와 천기산(지금의 시민의 종이 세워진 산)을 깎아서 갯벌을 매립하고 조성한 무안통 3ㆍ4정목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일인의 거주지가 되어 상반정 1정목, 2정목이라 하였다.
지금의 조흥은행 목포지점이 바로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죽동
본래 목포부 부내면 지역으로 개항이후 바다를 메워 시가지를 만들기 전까지는 지금의 목포극장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목포가 축항시설을 하고 부두에 하역인부들이 모여들면서 일꾼들에게 죽을 끓여 팔던 사람들이 있어서 죽거리 또는 죽동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현 성산교회 앞 바다로 돌출된 지점에 대밭이 있어서 죽동이라고 하였다한다.
1907년경에 2,3채의 한국인 가옥이 있었는데 삼향면 왕산리 봉수봉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洪種宇(上海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자)가 여기서 살았던 적도 있었다 한다. 1914년 남교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죽동이라 하고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호남동
1911년 호남선철도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철로를 부설할 곳만 일부 매립공사가 이루어져서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자리는 호수처럼 되어 있어 어떤 이는 신죽호(新竹湖)라고 불렀다는 말도 전하며 질펀한 개펄로 이루어져 개펄등이라 하였는데 1913년 12월 9일 전라남도고시 제42호로써 남교동, 죽동, 신창동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호남정이라 불렀으며 광복후 왜식동명 호남정을 호남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호남, 대안, 창평, 명륜의 4개동이 호남동회 관할이 되었다.
대안동은 일제시대에 죽교, 남교동, 신창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정정(大正町)이로 하였다가 광복후 대안동으로 고쳤고 창평동은 죽동, 남교동, 신창동의 각1부를 합하여 창평정(昌平町)으로 하였는데 광부복후 왜식동명을 바꿀 때 정을 동으로만 고쳐 부르게 했으며 명륜동은 죽동, 신창동 각1부를 합하여 명치정(明治町)이라 하였는데 광복후 명륜동(明倫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루테기(마루터기ㆍ대장간 마루테기)
현 기업은행 목포지점 앞에서 목포극장으로 가는 고개를 마루테기라 하였다.
마루테기는 무루터기의 사투리로 각국거류지와 한국 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마루라 해서 마루테기라고 했으며 일제시대에 법원(지금의 측후동교회)앞에 대장간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대장간 마루터기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1919년 4․8독립만세운동 당시 목포시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고 외치던 목포의 역사의 터전이기도 하다.


◎부내면(府內面)
목포의 부내면은 당초 무안부 부내면이었다가 목포부 부내면이 되었는데 개항이후 형성된 한국인 마을들을 부내면에 편입시켰으며 지금의 죽동, 북교동, 남교동, 양동, 대성동 등이었다.


■난포간
죽동에서 속칭 만복동 고개를 넘어 앞산과 마주 바라보이는 곳 즉 죽동 옛 법원관사(지금의 초원빌라)에서 원불교 교당 뒤쪽 동네가 「난포칸」이라는 동네다.
이곳도 본디 바위산이었던 곳을 다이너마이트(난포)로 발파해서 그 돌로 남교동 옛 중앙공설시장, 수문통거리 일대의 간척지를 매립했고 또 앞쪽에 축대를 쌓아서 이룩된 동네로 속칭 「난포튼다」 즉 「발파한다」는 말로 난포를 터서 이룩된 동네라고 해서 「난포칸」이 되었다한다.
「난포」라는 말은 대포(大砲)와 같이 한 방향으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터진다는 난포(亂砲)발파의 뜻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곳은 콩나물 동네라고도 하는데 이곳 주민들이 콩나물을 길러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말방골
목포극장에서 만복동 고개로 올라가는 길 어구 왼편 골목에 막다른 집이 있는데(죽동 230번지) 그 집터가 바로 옛날 말방자리이다. 옛날의 통신수단은 주로 역마에 의존했었고 관청에서 공문 등을 급히 보낼 때 파발마를 타고 역참(驛站)과 역참사이를 달렸는데 이 일대에 1300여평의 부지에 말을 기르던 말방이 있었고 마부들이 거처하던 건물이 2동이나 있었다한다.
이 말방골은 목포가 개항되던 1897년 12월 25일 당시 한국정부에서 무안우체사(務安郵遞司)를 개설하였고 다음해 1898년 2월 7일에는 무안전보사(務安電報司)를 병설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의 우편설비는 한국정부의 체면을 유지하는데 불고했고 또한 당시 일반 민간인도 이것을 이용할만한 지식이 없었다고 한다.


◎만복동
우체사가 있었던 죽동의 언덕배기 일대(앞산 밑)을 만복동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지명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11년에 발행된 목포지도에는 만복동이라는 지명이 나와 있으나 1913년 12월 9일 전라남도고시 제42호로 목포의 지명을 정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 이 지명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다만 구전으로 불려 오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그 이름마저도 부르지 않게 되었다.


■송쟁이 담(송영이 담)
전 소망 아동원 밑 돌담을 송쟁이 담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일본인 송영묘태랑(松永卯太郞)이 석축을 쌓아 집을 지었는데 송영이라는 사람이 석축을 쌓았다하여 송영이 담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송쟁이 담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죽동육거리
목포극장에서 유달산 쪽으로 조금 가면 여섯갈래의 길이 죽동육거리이다. 원불교 교당쪽으로 가는길, 마인계 잔등으로 해서 앞산 밑 구름다리를 건너서 북교동쪽으로 가는 길, 안저자거리로 가는길, 유달산쪽 큰샘거리로 가는 길, 노라노 양재학원으로 가는 길, 최태옥병원 앞으로 해서 목포극장쪽으로 나가는길 등 여섯갈래의 길이다.


■만인계터(마인계터)
죽동육거리에서 북교동 쪽으로 나가는 언덕이 바로 만인계터이다.
만인계터(목포사람들은 보통 마인계터라고 부른다)는 개항과 더불어 항만에 하역업무가 늘어나고 시가지의 매립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만인계라고 하는 무진계를 하였는데 지금의 복권과 비슷한 방법으로 돈을 내서 일정한 금액이 모아지면 추첨을 하여서 당첨자에게 많은 상금을 주는 행사였다. 이 행사가 있는 날이면 멀리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많은 재산을 잃은 사람도 있고 사람이 많이 모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들이 생겨 폐지되었는데 이 때 만인계를 하던 곳이라 하여 만인계터라 하였다.


■쌍새암거리
죽교동 397-77에 쌍샘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한다.


■안저자거리
지금의 홍안과 옆에서 죽동육거리로 가는 길을 안저자거리라 하였다. 이 길의 양쪽으로 저자가 늘어서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안저자거리는 1905년경 유곽(遊廓)이 공인되었다가 1913년경 앵정(櫻町;금화동)으로 이전한 적이 있었고, 1960년대에는 색주가가 있는 골목으로 유명하였으며 또한 70년대에는 장의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서 널집골목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죽동포구
개항당시만 하여도 죽동은 바닷가였다. 지금의 목포극장자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여기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역전파출소 앞의 갯고랑을 지나 동섬(송도;동명동 언덕)을 돌아 바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삼일여관 골목
목포극장 앞에서 최태옥외과병원을 지나는 길을 삼일여관 골목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 삼일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골목길은 노폭이 2~3m 정도로서 지나다니는데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은 길이었는데 1973~4년경 도로를 확장 포장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상반좌(常盤座)자리
상반좌는 목포시 상락동 목포녹십자병원 옆 유달카바레 자리에 1908년부터 1929년까지 있었던 극장이다.
1921년 김우진이 관여하던 동경동우회 학생순회연극단이 공연했고 막간에 홍난파와 한기주의 연주, 윤심덕의 독창이 있었으며 1923년 6월에도 윤심덕은 육영회가 개최한 음악대회에서 동생 윤성덕, 그리고 채동선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곳이다.


■목포철도병원(자리)
지금의 삼성생명자리에 목포철도병원이 있었다.
1920년 10월에 신축하여 호남정철도 의무실을 확장 운영하였는데 일반시민의 진료도 하였다.


■개벌등, 갯벌정
1911년 호남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목포역에서 철로가 지나가는 길만 매축되어 철로가 부설되고 양동의 동쪽으로는 매립이 되지 않아 물웅덩이와 갯벌로 이루어진 간석지였다. 그래서 일부 물이 고인 곳은 “신죽호”라 불렀고 갯벌땅을 갯벌등이라고 불렀다.


■철도배수지와 터진목
호남동1번지 종원하이츠 옆에 철도배수시설이 있다. 목포소방서 호남동파출소 앞에서 올려다보면 보이는 시설이다. 또 그 언덕 밑을 지나는 길을 터진목이라 하였는데 역전쪽에서 산정동건널목으로 가는 길을 뚫으면서 철로 쪽의 바위를 헐지 못하고 가운데만 꿰뚫었기 때문에 터진 목이라고 불렀는데 1970년대 광목간 도로를 확장 개설하면서 철도변쪽의 바위를 헐어버리고 건널목도 넓혀서 호남약국 앞으로 새로 길이 뚫렸다.


■멜라콩다리
남교동 수문통으로 뻗어있던 갯고랑이 한국통신 앞에서 역전광장을 돌아 동명동 앞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국통신 앞에서부터 복개가 되지 않아 역으로 가려면 역전 파출소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는 일제시대에 놓인 다리로 소화교(昭和橋)라 했었으며 1960년초에 한국통신 앞에서 역전파출소까지 복개되었으나 역전파출소부터는 복개가 되지 않아서 상락동 동명동 주민들이 목포역에 오려면 많은 불편이 있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역구내에서 소하물을 운반하던 박길수라는 사람이 지금의 한진약국 앞에서 철도소하물취급소가 있는 곳에 사비와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박길수의 별명인 멜라콩을 붙여 멜라콩다리라 하였다. 박길수는 지체가 부자유스런 장애인으로 어려운 일을 했다하여 「멜라콩 다리」라고 새겨진 돌이 철도부지의 한진약국 앞쪽 담에 세워져 있다.


■공설운동장 자리
1930년 매립된 갯마장(갯벌등)에 3,600여평의 운동장(야구장, 테니스장)을 만들어 관람석과 펜스시설을 하고 관리인을 두어 유료로 운영하였는데 광복후 항도여중, 중앙초등학교로 되었다. 항도여중은 목포여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호남동 동사무소에서 발간한 「호남동풍정」이라는 책자에 갯마정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서 파발말을 키우고 조련했던 곳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적었는데 중앙초등학교자리가 광복후 기마경찰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기산, 오포산
지금의 ‘시민의 종’이 있는 곳이다.
1904년 4월 1일에 개소된 측후소가 있었던 곳으로 측후소가 천기를 보는 곳이라 하여 천기산이라 하였으며 노적봉 옆에 정오(正午)를 알리는 신호기구로 사용되었던 오포(午砲)가 설치되어 있어서 오포산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1968년 개국한 RMB라디오 목포방송국이 있었던 곳이다.


■생애꼴창
죽동구름다리 밑을 지난 앞산 밑 골짜기에 상여를 놔두었던 움막이 있었다 하여 생애꼴창(상여골짜기)이라고 하였다 한다.


■감나무꼴창(감나무골창)
지금의 소망 아동원 밑 골짜기를 말한다. 옛날에 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감나무골창이라고 했다. 지금도 60대 이상 되신 분들은 감꽃 주으러 다녔던 추억담을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