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땅이름
만호동
작성일
2024-12-31
조회
29

▣만호동(萬戶洞)
조선조 세종때 수군진영이었던 목포진을 설치하여 수군만호가 있었던 곳으로 목포진, 만호진이라 불리워 오다가 일제시대에는 목포진이 속해있는 동해안통 7정목을 목포대라 불렀으며 1948년 4월 1일 동명변경에 따라 만호동이라 칭했다. 1949년 동제 실시에 따라 중동(仲洞), 만호동(萬戶洞), 수강동(壽康洞), 해안동(海岸洞), 항동(港洞), 유동(柳洞), 금동(錦洞), 경동(京洞)의 8개동을 관할하였으며, 1997년 1월 1일 행정동 분합에 따라 영해동과 만호동을 통합하여 만호동으로 하였다.
영해동은 영해동을 비롯하여 축복동, 행복동, 보광동, 산정동 등 6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목포대
일제가 해벽을 쌓아 시가지를 매립하면서 목포진이 있었던 자리의 일부를 목포대라 불렀다. 이 일대는 개항직후 영국이 영사관 기지로 쓰기 위하여 매입하였던 곳으로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영국 영사관을 짓지 못하고 일반에게 불하하여 개인소유가 되었다. 민가에서 「大英國政府基地」라는 비석 2개가 발견됐다.
■수강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동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동해안통 1정목을 수정(壽町) 1정목과 2정목으로 부르다가 왜식동명을 바꿀때 수강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해안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남쪽 해안인데 각국 거류지로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해안통 1정목, 2정목을 해안통(海岸通) 1정목, 2정목, 3정목, 4정목으로 바꾸어 불렀다가,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1정목 2정목을 합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3정목과 4정목은 죽교동에 편입되었다. 1949년 동제실시에 의하여 만호동의 관할이 되었다.
■항동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목포세관부지와 무선전신소 부지를 병합하여 목포항이 되므로 항정(港町)으로 부르다가 광복후 항동으로 고쳐 불렀다.
■중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본정통 1부와 목포대, 산수통 3정목 일부를 합하여 중정(仲町) 1정목, 2정목으로 하였다가 광복 후에 중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목포상공회의소가 있다.
■유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남해안통 3정목 일부를 유정(柳町)으로 고쳤다가 광복후에 유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금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본정통, 목포대, 남해안통 3정목 1부를 금정 1정목, 본정통 1부와 남해안통 3정목 1부를 금정 2정목으로 부르다가 광복후 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경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본정통, 목포대, 산수통 3정목의 각 일부를 경정(京町) 1, 2정목으로 하였다. 광복후에 경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경동천주교회가 있다.
■영해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동남쪽을 간척하여 각국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1정목, 2정목의 일부를 영정(榮町) 1, 2정목으로 부르다가 광복후 영해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행복, 영해, 축복, 보광의 5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축복동
남해안통 4, 5정목의 일부를 축정(祝町) 1, 2, 3정목으로 부르다가 광복후 왜식동명 변경으로 축복동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행복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 거류지가 되었는데 동해안통 2정목, 3정목 일부를 행정(幸町) 1정목, 2정목으로 부르다가 광복후 행복동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보광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동해안통 3정목, 4정목의 일부를 보정(寶町) 1, 2, 3정목으로 부르다가 보광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복만동
본디 목포부의 지역으로 목포항의 동남쪽 갯벌을 간척하여 각국거류지가 되었는데 무안통 1정목, 2정목의 각1부를 복산정(福山町)이라 부르다가 광복 후 복만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산정동
연동지선의 갯벌이었는데 동명동에서 삼학도와 갓바위가 제방이 쌓여 육지가 되면서 삼학도 일대가 산정동으로 되어 영해동의 관할이었는데 해양수산청, 한국제분이 있는 곳이다.
■갯고랑, 운하
개항당시 동쪽 해안(영해동 일대)과 남쪽 해안(해안동 일대)에서 유달산 기슭으로 들어가는 갯고랑이 두 줄기 있었는데, 여기를 준설해서 목포대(만호진)의 북쪽에서(지금의 영란회집 앞) 접속시켜 운하를 만들면 시내의 교통 등 도시발전에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유지의 곤란 등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갯고랑으로 벼 2, 3백석을 실은 배가 옛 초원관광호텔 앞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부영잔교(富永棧橋) 조기잔교(朝汽棧橋)
영해동에서 몇 군데의 부잔교(浮棧橋)가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부영선구점(富永船具店:조흥은행에서 해안쪽으로 가서 삼거리의 왼쪽 모퉁이에 있었다.) 앞에 있는 부잔교를 부영잔교라 불렀는데 이 잔교를 부영선구점에서 전조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또 제일은행에서 해안쪽으로 내려간 부두에 있는 부잔교를 죠끼 산바시(朝汽棧橋)라 했는데 여기는 조선기선주식회사(朝鮮汽船株式會社)의 전용잔교였다. 광복후에도 상당기간 도미나가 산바시, 죠끼 산바시로 불려오다가 영해잔교, 소양잔교, 대흥잔교 등으로 불리웠다.
■목포진 유적비
목포시 만호동 1의 56번지에 있는 목포만호진의 유적지임을 나타내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일제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것은 목포진 유적을 일제가 목포대라고 부르면서 목포진의 유적임을 나타내고 목포진의 흔적밖에 없던 한촌(寒村)을 자기들의 노력으로 훌륭한 도시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이런 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성벽이나 건물의 흔적도 전혀 찾을 길이 없다. 그것은 영국영사관 기지로 사들인 영국정부에서 민간인에게 불하하였기 때문에 유적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면화회사 자리
지금의 송광비치아파트 자리이다. 일제가 육지면의 재배에 성공하자 이 지역의 농가에 육지면의 재배를 강요하여 실면을 일본으로 실어내다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면공장을 세워 1차 가공한 조면을 가져갔던 자리이다.
■일화(日華)제유공장 자리
지금의 목포수협신용부 자리이다. 솜을 뽑아낸 무명의 씨에서 기름을 짜낸 공장이었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고급기름은 식용유로 썼고, 중급기름은 비누를 만들었는데 러시아산 등성이에 살던 가난한 한국인 근로자들은 기름찌꺼기를 걷어다가 양잿물을 섞어서 새까만 “똥비누”를 만들어서 썼던 한 맺힌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1918년 설립된 조선제유주식회사로 우리나라 유일의 제유공장이었으나 1926년 일화제유로 합병됐다. 1926년 이곳에서 발생한 파업투쟁은 1920년대 항일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힛빠리 골목
지금의 항동시장 일대에 있던 사창가 골목이다. 1970년대 초 부두 정비 사업으로 철거되기 전까지 붉은 등, 파란(초록) 등을 켜 놓고 아줌마들이 지나가는 손님의 옷소매를 끌면서 호객을 했던 곳이다.
■삼학도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상징의 하나로 목포항 동남쪽에 위치한 면적 1.12km2, 해안선 길이 4.3km로 연륙이 되어 개발되기 전까지는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 삼학도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73m이다.
삼학도에는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이 삼학도의 지명의 유래를 말해주고 있는데,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대 삼학도와 갓바위를 잇는 방조제가 쌓였고, 대 삼학도, 중 삼학도, 소 삼학도 사이가 매립되어 섬으로서의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부두가 축조되고 공공기관과 공장이 들어서면서 목포의 상징으로서의 삼학도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 동안 옐로우 하우스가 옮겨지는 등 숱한 수모를 겪기도 하였으나 뒤늦게 공원화 사업으로 다소 정비가 되었고, 대 삼학도 터에는 삼학사(三鶴寺)가, 중 삼학도에는 심원사(深源寺)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삼학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삼학동에는 삼학도가 없고 엉뚱한 동의 관할로 되어있는 것도 어쩌면 일본인에게 몰래 팔려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더니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지명에서마저 소외된 듯하여 씁쓸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