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땅이름
하당동
작성일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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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당동
본래 무안군 이로면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화동과 하당리, 하신진의 각 일부가 부내면의 내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상리라해서 무안군 이로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11월 21일 동제실시에 의하여 목포시에 편입, 이로동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4년 7월 6일 목포시 규칙 제1137호에 의거하여 이로동에서 상동과 용당동으로 분동되면서 상동에 속하였으며, 1997년 1월 1일 목포시 조례 제 1805호에 의거하여 상동을 상동, 하당동, 신흥동으로 분리하였다.
■하당(下塘)과 당곶진(唐串鎭)
하당은 목포에서 영산강을 조금 올라간 이로면 상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지금의 하당 초등학교와 하당동 사무소 부근이다.
그런데 하당과 당곶진, 극포영이 기록에 보면 한 곳이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極浦營麗季海冠强梁創水軍處置使營今二老下塘之地是也」(邑誌) 당곶(塘串)은 곧 ‘땅꼬지‘로 현재의 하당부근이니, 고려말 공양왕대에 극포영(極浦營)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곶진(塘串鎭)으로도 불리웠다. 또한 창꼬지 또는 창꽃이라고도 했다 한다.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뜰망배 선착장 구실을 했으며 년중 마르지 않는 성샘이 있었는데 수질이 좋아 일본인이 양조장을 세웠고, 광복후에도 삼학양조에서 여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한다. 또한 웃동네(상리) 중화동, 큰 목 사람들의 식수역할도 하였다 한다.
■와우봉(臥牛峯)과 일본송(一本松)
상리 중화동에서 바닷가로 흘러내린 언덕이 호남선 철도의 부설로 하당에 생긴 언덕을 와우봉이라 했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하당동 사무소의 앞길 건너편이다. 이 언덕에는 큰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임성리의 일본송(任城里의 一本松)」이라 하여 목포에서 임성리로 들어갈 때 표지를 삼아 다녔다고 한다.
이 소나무 언덕에는 사연도 많은 데 1900년대 초 한국인 근로자들이 악질 일본인 후지끼(藤木弘助)라는 자를 구타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또한 후지끼가 삼향면에 사는 吳某라는 사람을 구타 살해하여 吳씨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하여 후지끼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서 목에 걸고 이 길을 지나 경무서로 갔다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토취장으로 되어 이 나무를 베어 내는 데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