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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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2월 27일,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일남사녀 중 넷째로 태어남. 부친 김상현(金相賢)은 근동에 알려진 지주.
1933 도항.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
1934 아카데미 아방가르드 조직에 참여.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후지다 쓰구지, 도고 세이지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음.
1935 광풍회(光風會), 백일회(白日會)에 각각 입선. 이과전(二科展)에 <종달새 노래할 때>로 입선. 백만회(白蠻會)조직. 첫 전시에 수십 점 출품.
1936 백일회에 <중야(中野)풍경> 입선. 백만회에 수십 점의 작품 출품. 이과전에 <25호실의 기념> 입선. 같은 해 겨울. 이과전 9호실 작가전(통칭 九室會)에 출품.
1937 백만회에 열다섯 점 출품. 동경 아마기(天城) 화랑에서 첫 개인전. 개인전을 끝내고 귀국.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에 회우(會友)로 참여. <항공표지>출품.
1938 자유전에 <론도><아리아><백구> 석 점을 출품.
1939 자유전에 <향(響)><여(麗)> 출품.
1940 자유전에 <창><섬 이야기> 출품. 자유전의 경성전에 <섬의 이야기><정물><풍경 1><풍경 2><아타미 풍경><실내악> 출품. 이때부터 자유전이 미술창작가협회로 이름이 바뀜. 정자옥(丁子屋) 화랑에서 개인전. 1941 「미술창작전」에 <바다 A><바다 B>와 또다른 <바다 A><바다 B> 출품. 이 전시를 끝으로 「미술창작전」에서 탈퇴.
1944 5월, 서울의 일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고희동(高羲東)의 주례, 정지용(鄭芝鎔), 길진섭(吉鎭燮)을 청첩인으로 해서 김향안(金鄕岸)과 결혼.
1948 서울대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 일년 후 사퇴. 영영국, 이규상과 더불어 신사실파 창립. 화신사랑에서 1회전. <꽃가게><산><달밤>등 열 점 출품.
1949「국전」창설. 1회전에 서양화부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으로 참여. <정일(丁日)>출품. 동화화랑에서 신사실파 2회전을 엶. 새로 장욱진(張旭鎭) 가듬.
1951 부산으로 피난. 해군 종군화가단원.
1952 피난 온 홍대에 미술과 교수로 부임. 부산 남포동 뉴서울다방에서 개인전. <진해풍경><파잣집><달밤> 등 출품.
1953 3회「신사실파전」에 <봄><불상> 등 여덟 점 출품. 신사실파엔 새롭게 이중섭, 백영수가 회원으로 가담. 「신사실파전」은 3회를 끝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함. 서울 수복. 다시 성북동에 자리잡음. 2회「국전」에 <호월(壺月)> 출품.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1954 미공보원(USIS)에서 개인전. <꽃><산><항아리><창><섬에서><월매>등 열두 점 출품. 「국전」에 <달><항아리> 출품.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1955 국전에 <하늘><산> 출품.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1956 동화화랑에서 개인전(도불전),<학><여인과 항아리> 등 스물다섯 점 출품. 5월, 파리로 떠남. 파리 베네지트 화랑에서 갱니전. 이탈리아 피렌체 단테의 집에서 「파리의 예술가전」에 다섯 점의 작품 출품.
1957 파리에서 제작한 작품 <영원의 노래><정원><봄>등 스무 점으로 베네지트 화랑에서 개인전. 니스 무라토르 화랑에서 <달><새> 등 스물다섯 점으로 개인전. 브뤼셀의 슈발드베르 화랑에서 <나는 새> 등 마흔 점으로 개인전.
1958 파리 앵스티튀트 화랑에서 <봄><무제> 등 스무 점으로 개인전.
1959 귀국.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산월><달밤의 사슴><영원의 노래>등 마흔 점으로 귀국전. 서울 반도 호텔 내에 있었던 반도화랑에서 <달과 산><달과 호수> 등 삼십여 점의 과슈로 개인전. 「국전」에 〈산월풍경〉출품.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1961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야상곡(야상곡)〉시리즈,〈산〉시리즈의 유화와 과슈 수십 점으로 개인전. 홍익대 미술학부장.
1962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달을 주제로 한 작품전. 예총 부이사장에 피선, 대학 정비령에 의해 홍익미술대학이 되면서 초대학장이 됨.
1963 새로 통합된 미술단체인 한국미술협회의 회장으로 피선,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김환기 데생전」개최. 한국미술평론인회 창립에 참여, 「상파울로 비엔날레」출품작 가로 〈섬의 달밤〉등 세 점 출품, 회화 부문 명예상, 10월에 뉴욕 도착.
1964 뉴욕 아시아 하우스에서 개인전.
1965 8회「상파울로 비엔날레」특별실에 초대. 열넉 점의 작품 출품.
1966 뉴욕 타스카 화랑에서 개인전. 〈밤의 소리〉〈하늘〉등 유화 스무 점이위의 유채 다섯 점 출품.
1968 뉴욕 고담 서적화랑에서 개인전. 〈밤의 소리〉〈하늘〉등 유화 스무 점, 종이 위의 유채 다섯 점 출품.
1969 달라스 시의「미국 내의 아시아계 화가전」에 참가.
1970 한국일보 주최「한국미술대상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 수상. 경복궁 미술관에서 전시.
1971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개인전. 전면점화의 대작들 출품. 서울 신세계 화랑에서 종이 위의 유채 작품 마흔다섯 점으로 개인전. 뉴욕으로 떠난 후 최초의 국내전.
1972 코네티컷 주에서 열린「실버마인 길드전(The silvermine Guild of Artists)」에 출품. 바이텀(Vitam)상 수상.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개인전.
1973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개인전.〈하늘과 땅〉〈십만 개의 점〉등 대작
1974 루이지애나 수레브포트의 반웰(Barnwell) 아트 센터에서 유화 넉 점, 종이 위의 유채 마흔 점으로 개인전. 뉴욕의 포트체스터에 있는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입원 가료중 뇌일혈로 운명. 향년61세.
사후 1975년에 뉴욕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린 이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상파울로 비엔날레」특별초대회고전, 동경화랑회고전(1977), 현대화랑회고전(1977)등이 잇달아 열림. 1984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주기 회고전」,1987년 파리 국립조형 예술센터에서의「김환기 뉴욕10년전」등을 비롯 수 차례에 걸친 회고전 등이 기획.
1992년엔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건립되어「김환기 뉴욕 1963-1974」전을 비롯,「영원의 노래」(1993, 김환기 탄생 80년 기념),「김환기 장정과 삽화」(1993),「수화와 향안 50년」(1994),「김환기 20주기 기념전」(1994),「김환기·십자구도전」 (1995)이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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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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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전 작품 생애를 통하여 유화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다. 1930년대 구상으로 출발 1970년대의 전면점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의 유화는 캔버스 뿐만이 아닌 종이나 신문지 등에 다양한 시도로 다채로운 효과를 보여준다.
*김환기의 과슈 작품들은 서울, 파리, 뉴욕 시대에 고루 제작되었는데 특히 뉴욕 시대인 60년대 그 풍성한 결실이 돋보인다. 또한 이 시기 김환기의 적극적인 선택으로 보여지는 과슈는 유화와 수채의 중간적인 매재로서의 성질과 아울러 구상에서 추상으로 진입하는 전개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김환기는 유화이외에도 다양한 기법을 시도, 많은 드로잉, 과슈, 판화와 수채작품을 남겼다. 맑고 영롱한 빛깔이 돋보이는 그의 수채는 화가의 전 시대를 통해 보여진다.
*'손장난'이라고 표현한 많은 드로잉을 남긴 김환기는 그린다는 개념으로서의 드로잉에 대한 인식이 누구보다도 높았다. 즉 단순한 밑그림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완성미를 지니는 작품으로서 인정하고 드로잉과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타블로화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예술가로서의 부단한 탐구 정신과 기질을 함께 엿볼 수 있게 하는 김환기의 파피에 마셰(갖풀 먹인 딱딱한 종이-일종의 종이 찰흙-로 만드는 오브제 작품)는 60년대 말 화가가 뉴욕에 머물던 시기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작가에게는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한 빛깔과 재치있는 형태가 돋보인다.
*단순한 드로잉이나 산뜻한 색채들과 함께 경쾌하게 구성된 김환기의 꼴라쥬 작품들에는 한지와 양지(주로 색지) 그리고 신문지등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는데 이들 작품들은 전면점화의 초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60년대 말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 이상은 환기미술관에서 소개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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