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 예술인

김우진

작성일
2024-12-31
조회
77


 

이      름

김우진(金祐鎭) Kim woo jin

아      호

수산(水山) 또는 초성(焦星)

생년월일

1897∼1926. 8. 4

출  생  지

장  성

분       류

근대극작가(문학/희곡)

생      애

김우진은 1897년 안동 김씨의 후예인 목포의 갑부요 개화사상가이자 목포 개항 당시 무안 감리 (務安 監理)를 지낸 김성규(金星圭 1863-193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를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라 하고 목포공립 보통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8세에 일본 구마모또(態本)농업학교에 입학하였고 19세에 곡성(谷城)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하였으며 그후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농업학교 시절에 시작(詩作)에 심취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1920년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 유학생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했는데 여기 소요되는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아일랜드 극작가 '던세니'가 쓴 상연작품 『찬란한 문』은 그가 직접 번역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해서는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였고 회사 재임시에 많은 작품(시 50편, 희곡 5편, 소설 3편, 평론 20편)을 남겼다. 지금은 카톨릭교회가 들어섰지만 그가 살던 목포시 북교동 46번지의 방대한 대지 위에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살던 안채와 별채가 즐비했었고 그는 2층 양옥인 「백수제」에서 작품활동을 했었다.
그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일찍부터 신사조에 접할 수 있어서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되어 있었으니 그의 사상에 바탕이 된 '니체'나 '마르크스'의 사상과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한다. 따라서 거의 연극에서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와 전통부정정신(傳統不定精神) 그리고 "버나드쇼"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전통인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등 급진적 자세를 견지한 작품세계와 그의 자살원인은 그러한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26년 8월 4일 김우진은 그와 예술적 애정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 도꾜 우에노 음악학원 출신이자 '사의 찬미'를 불러서 국내외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尹心悳)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연락선에서 현해탄으로 투신정사(投身情死)하였다. 그때의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지식인의 어처구니 없는 종말에 대해서 반신반의와 무책임한 처사에 대한 질책으로 보도 되었다한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는 노부모와 처 정(鄭)씨 부인과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엄연한 회사의 대표이고 엄청난 재산가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웅변해 주듯이 그에게는 「사회개혁」이라고 하는 대철학이 엄존했었고 할 일도 많았을 그가 더욱이 29세라고 하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 나이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원인을 그의 작품세계에서 찾으려는 연구가 여러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시대적인 고민과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로 일단락이 된 것이다.

문학세계

"신파극만이 연극의 전부였던 1920년대에 그의 희곡은 우리나라 언어로 쓴 최초의 근대극이며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고려대 국문과 서연호(徐淵昊)교수는 김우진의 최후 작품『산돼지』(3막희곡)를 이렇게 평가했다.
김우진의 문학적 근대성은 그의 시(詩)보다는 산문(散文)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1922년 3월 15일의 일기에는 「새로운 진실한 예술은 인생의 전국(全局)으로 서의 예술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갈파했는데 그의 예술관을 요약하는 대목으로 당시 한국문단을 주름잡던 이광수류 문학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생의 절실한 체험을 구체성과 개별성에 입각해서 기술하게 될 때 문학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한시대의 문학과 국민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①「문법을 통일하고」② 「언어사전을 정비하며」③「민족문학의 유산인 구전문학(구전문학)을 채집하여 문자로 정착시킴으로써 후세의 문학토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르별로 보는 그의 문학
·희곡분야는 그의 문학적 근대성을 작품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正午」「이영녀(李永女)」「두더지시인의 환멸」「난파(難破)」「산돼지」가 창작희곡이고  번역작품으로 「위렌부인의 직업」이 남아있다. 특히 「이영녀(李永女)」는 3막짜리 극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며 「난파」와 「산돼지」는 1926년에 쓴 우리나라 문예 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신파극만 존재하던 시대에 실로 전위적 실험극이었다. 「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의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산돼지」는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이 작품을 친구에게 편지로 소개하면서 「이 작품은 조선청년의 생명력을 추상해 본 것」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내용을 담고 있다.
·평론분야는 김우진이 이론으로써 가장 탄탄한 근대성을 과시했던 분야다. 그 중에서「소위 근대극에 대하여」「자유극장이야기」「사옹(沙翁)의 생활」「구미(歐美)」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인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잡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我觀)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에서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辭典)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 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적절히 투영함으로써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 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우리나라 유일의 극작가였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관련유적

현재 북교동 성당이 자리한 지역의 일대가 김우진의 아버지인 김성규가 살던 성취원이 있던 곳으로, 초성도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관련자료

인물사진,  유고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