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목포의 예술인

이난영

작성일
2024-12-31
조회
63


 
이       름 이난영 李蘭影
생년 월일 1916∼1965. 4. 11
출  생  지 목포
분       류 가수
생       애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李南順)의 장녀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 이후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문일석 작사인[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恨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65년 4월 11일에 세상을 등진 그녀는 4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여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다.
주요 활동 1933년 8월 태평에서 <지나간 옛 꿈>과 <시드니 청춘>을 발표하여 정식 데뷔.
1933년 10월 <향수> 취입, 11월 <불사조>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신 강남>과 <밤의 언덕을 넘어> 발표. 신민요 <봄맞이>, <오대강 타령>으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함.<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7년 목포의 눈물 속편격인 <해조곡>을 발표하여 다시 한번 히트를 기록.<해조곡>은 표면적으로는 님을 그리워하는 가사로 구성되어 있으나 징용 등으로 끌려간 연인을 빗대어 반일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1938년 남인수와 듀엣으로 <흘러간 고향집>, 김해송과 <흘려본 가정 뉴스>, 김정구와 <연예 삼색기> 등 발표
1939년 <제3일요일>, <달 없는 향로>, <연락선 비가> 등을 노래하였으며, <다방의 푸른꿈>을 출반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함.
1940년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 <진달래 시첩>
1942년 항구 노래의 완결판이자, 그녀의 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를 발표  하여 또 한번의 대대적인 인기를 끔.
추모 사업 현재 유달산 달선각 아래에는 이난영을 추모하는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목포시에서는 이난영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이다.
관련 자료 이난영과 노래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