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역사의 길

목포진(木浦鎭)

작성일
2024-12-31
조회
30
지 정: 도지정 문화재자료 : 제137호
소 재 지: 목포시 만호동 1-56
지정년도: 1986년
제작시대: 조선시대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며 진의 우두머리인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며 호남과 경상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진이 설치되게 되는 배경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현(寶城縣)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이온데,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1/04/15(임진)


이와같이 목포(木浦)는 그 길목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주목받게 되었으며, 그 곳을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기 위해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되었는데,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그보다 후대인 연산군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선상수어(船上守禦)'의 원칙에 따라 수군만호(水軍萬戶)는 항상 병선(兵船)을 이끌고 해상을 왕래하며 방어와 수색의 의무를 수행하였고 해당된 영(營)·진(鎭)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 두고 있었다. 이후 선상방어상의 어려움을 인정하여 1501년(연산군 7년)대에 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목포진지』에는 만호(萬戶, 무관 종4품) 1인 외에 군관(軍官) 6인, 진무(鎭撫) 7인, 사부(射夫) 2인, 사령(使令) 5인의 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만호는 인근 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 등 병사업무의 수행 이외에 진영 소재지 인근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한반도 서남해 방어지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 군사제도의 개편요구에 따라 목포개항 2년전인 1895년 7월 16일 칙령 제141호로 폐진되었다.



목포진의 상징적 의미


목포의 첫 번째 자랑, 목포역사의 출발지


<역사의 길> 걷기의 첫 번째 출발지로 목포진을 선정한 이유는 이곳이 목포의 역사를 실증하는 최초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목포라는 지명이 옛 문헌상 등장하는 내용 중 지금의 목포와 지리적으로 일치하기 시작 한 시기가 바로 목포진이 설치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목포역사의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 진(鎭이) 설치됨으로써 이후 개항 전까지 목포역사의 제1기라고 할 수 있는 약 500여 년 동안 군사 요해처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도시의 성격을 목포에 부여시켜 주는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목포진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초원실버타운 맞은 편 언덕에 있는 제일성결교회의 입구를 먼저 찾아가야 한다. 교회 앞의 오르막길을 따라 곧장 위쪽으로 약5분간 올라가면 현재 만호동 1의 56번지 앞 공터에 세워진「목포진유적(木浦鎭遺蹟)」이란 석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일대가 목포진성이 있었던 지역인데, 아쉽게도 옛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외로이 서있는 유적비만이 목포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구조물이 되어버렸다. 이외에 목포진과 관련된 유적으로 두 개의 석기가 남아 있는데, 구 일본 영사관 뒷뜰에 묻혀있던 것을 해방 이후 발견하여 현 목포근대역사관1관 앞 비석거리에 세워놓았다가 목포진 유적이 일부 복원되면서 현재는 목포진 객사 앞에 세워놓았다.


폐진 직후인 개항 당시만 해도 목포진 청사의 일부가 남아 있어 무안감리서, 일본 영사관 또는 해관으로 임시 사용되었는데, 목포진의 옛 청사가 잠시나마 무안감리서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목포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목포라는 도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매우 부족한 것은 과거 500여 년 동안 행정의 중심이 아닌 관방의 도시로서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 감리서가 설치됨으로써 실로 500여 년만에 목포가 이제는 행정의 중심도시로 변모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진지 주변은 그후 영국영사관기지로 편입되었다가 한일병합 이후에 다시 민가로 전용되었다. 목포진 일대의 성곽의 흔적은 옛 사진을 통해서나마 조금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인데, 이후 만호동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가 당시의 성돌이 사용되어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옛 성곽의 화려한 모습이나 뭔가 그럴듯한 구조물의 모습을 기대하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도답사의 일번지로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는 이유가 초당의 건물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산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함에 있음을 상기하면 이곳 목포진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비롯 옛 모습이나 풍광은 사라졌지만, 이처럼 목포역사의 제1기를 알리는 출발지이자, 관방의 도시에서 행정의 중심으로 변모하는 장소인, 목포진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며, 역사의 길 걷기 첫 번째 장소로 지정되기에 마땅하다.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면 뒤편으로는 부활의 몸부림을 치는 황폐화 된 삼학도와 목포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비석이 있는 공터를 오르내리는 길목에는 구 일본인 조계지와 유달산 일대의 모습이 보인다. 목포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가 이곳에서 출발되어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목포진의 복원시안」, 김지민


「목포 만호진의 설치와 변천」,이해준


『목포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