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학연구소

낭만 가득한 항구의 도시, 목포

역사의 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작성일
2024-12-31
조회
38
목포의 설움! 동척 건물


개 요

분 류: 도지정기념물 174호

명 칭: 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목포지점

소 재 지: 목포시 중앙동 2가 6

지정년도: 1999년 11월 20일

제작시대: 1921년 11월

연 혁: 1920. 6월 설립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1946∼1947년 신한공사 목포지사

1947∼1974년 해군 목포경비부 창설, 주둔

1974∼1989 목포해역사 헌병대 사용

1989∼1989 헌병대 이전 후 유휴재산 관리

1999. 8. 7 철거공사 착공, 중지

1999. 11. 20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 지정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는 1908년 3월 일본국 제24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이라는 것이 통과됨에 따라서 만들어진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창립당시 한일양국의 이중국적의 회사로 출발하였으나, 1910년 국권상실과 더불어 일본국적의 회사가 됨으로써 식민지 경영의 수탈창구 역할을 수행하여 한국인의 피를 먹고 성장한 괴물회사였다.

일본 동경에 본부를 둔 동척의 목포지점(중앙동 2가 6번지)은 목포가 개항지로서 급속히 성장하자 1920년 6월에 이르러 이곳에 설립되었다. 현 건물의 신축년도는 당시 신문보도를 통해 1921년 11월 7일로 여겨진다. 목포지점에는 크게 관리부와 금융부가 있었는데, 관리부에서는 농토관리 즉 소작관리를 주로 했으며 금융부에서는 각 농가에 돈을 융자해주는 일을 담당했다. 또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동척농업이민계획을 정치적으로 펼쳐서 조선지역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하여 조선지배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동척은 농업이민에 대하여 각종 특혜를 주었으므로 일본 농민들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와는 정반대로 한국농민들에게 있어서 동척은 말할 수 없는 수탈의 가해자였으며, 저항과 투쟁의 대상이었다.

실제 동척은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 한국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목포지점의 경우 전남 각지에 소재하고 있던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동척 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두던 제 1위의 지점이었다. 또한 토지경영만이 아니라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조선 농민을 수탈하는 금융기관으로서도 악명이 높았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 동척 목포지점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가장 상징적인 곳이며, 1930년대에 유행했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 목포의 설움을 만들어 냈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척 건물은 해방이후 해군에 의해서 사용되다가 89년 이후 현지 관리인 하나 없이 방치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멀어졌다. 웅장하던 건물도 주인을 잃어버린 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늙어만 갔고, 한때 일제의 잔재라 하여 여러 차례 철거될 위기를 맞기도 하여 건물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동척 건물 중 일본과 서울의 본점은 이미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국내에는 현재 부산지점과 함께 목포지점 건물 2개만 남아 있는 데 규모 면에서나 건축사적 측면에서 목포지점의 건물이 단연 앞선다. 동척은 초창기 일본인의 이주정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토지매입 등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토지가 밀집되어 있는 전라도 일대의 지점 건물이 더 규모가 컸던 것이다. 지난 99년 시민들의 뜻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목포근대역사관2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 지: 1447.9m2(438평)

·건 평: 1층 79.7평 2층 79.7평 계 159.4평

·구 조: 석조2층

·건축양식: 서구식(르네상스식)


이 건물의 내부는 많은 변형이 됐으나 외부는 건축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형태는 뒤쪽의 계단실 부분이 돌출된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건물로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정면출입구는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아치로 꾸민 출입 포치(porch:현관문 바로 앞에 사람이나 차가 와서 닿는 곳)를 두었고, 1층과 2층 사이의 외벽에는 방형의 문양 내에 양각의 원형 장식띠를 둘렀다.

창호는 수직 창이 설치되어 있어 건물의 수직성이 크게 드러나 있고, 창문은 목재 오르 내리창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고 천장의 갓 둘레에는 모울딩(moulding:건축이나 기구의 부분장식에 쓰는 띠둘림)한 장식띠가 여러겹으로 둘러져 있다. 또한 건물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이 여러 곳에 새겨져 있는데 외부 정면 입구의 태양문양, 좌측상단부 벗꽃문양과 건물 내부 1층 벽면에 장식된 태양문양 등이 있다.

목포의 설움,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적 건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까?


목포 역사의 길 걷기에 소개되는 지역들은 단순히 눈요기 식의 답사로 생각해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생각하며 느끼는 테마여행이 되어야 만이 이 일대 유적의 참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역사의 길』걷기 두 번째 지역에 해당하는 동척 건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동척 건물은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을 위한 기관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교묘한 방법으로 수탈했었다는 점과 해방이후 굴절의 한국현대사 속에서는 80년 5월 목포 시민군이 핍박을 받았던 장소였다는 점등에서 많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척 건물이 지니는 높은 가치는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상징성에 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서울의 중앙청 건물도 헐었는데, 이런 건물을 보존해서 무엇에 쓰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도 한다. 하지만 동척 건물과 중앙청 건물철거의미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역사적 보존가치 외에도 지리적으로 현 동척 건물은 예초에 일본인 마을 새롭게 조성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 경관을 해치거나 하는 환경문제와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구 개항장 일대 일본인 거리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동척 건물은 일본영사관, 일본식 정원 등 주변 유적지와 불과 5분 여 거리에 자리하고 있어 이 일대를 일본관련 문화관광특구로 조성한다면 지역경제에도 많은 보탬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동척 건물의 존폐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진행상황은 '동일(同一) 건물이 인식하기에 따라서 철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문화재로 보존해야 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가질 것이며,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들을 어떻게 현대 역사 속에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허름해진 동척 건물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동척 건물은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 건물' 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어 그 동안 시민들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외면되어 왔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다행히도 이 동척 건물은 현재는 도문화재(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국가지정을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 이 건물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목포 개항장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개항사 박물관이나 일제의 수탈만행을 보여주는 수탈사 박물관 등 여러 가지 방안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일대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에 머물지 않고,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해를 돕는 교육장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일본을 따라 잡기 위해서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지만, 실제 일본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문화공간이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항장일대의 유적들을 잘 활용하면 일본 관련 관광명소이자 일본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장소로 활용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참고문헌: 『서남문화연구소 회보2』, 서남문화연구소

『목포시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