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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사(木浦詩社)

작성일
2024-12-31
조회
71
목포시사(木浦詩社)


분 류: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명 칭: 목포시사(木浦詩社)

소 재 지: 목포시 죽교동 330-3

지정년도: 1975년 10월 11일

지정번호: 제21호

제작시대: 1900년대



 

유달산 정문에서 우측 일주도로를 따라 5분여 걷다보면 산기슭에 자리한 고풍스런 분위기의 목포시사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 목포시사의 실질적인 모태가 된 것은 1920년에 결성된 '유산시사(儒山詩社)'이다. 유산시사는 1920년 4월 29일에 창립되었는데 김성규와 최방현, 김현서 등의 목포 유림인들과 목포와의 왕래가 많았던 진도, 강진 지역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유산시사는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지만 진도에 유배되어 이 지역의 유학발전에 큰 공을 세웠던 정만조와 서울에 거주하던 당대의 한학자인 윤희구, 황귤성 등이 연계되면서 전국적인 시사의 규모를 갖추고자 하였으며 시사의 구성원들 또한 이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유산시사의 활동은 1932년 시사건물인 유산정의 창건을 계기로 활발해졌으며, 그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말에 목포지역에는 보인시사(輔仁詩社)라는 또 다른 문학결사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이후 각각 활동을 해 오던 유산시사와 보인시사는 1961년 통합되어 현재의 목포시사로 새롭게 발족하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무안지역에 속했던 목포는 개항되기 이전에는 수군기지인 목포진이 있었던 곳으로 현 목포지역에는 별도의 향교나 서원 같은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말기 유배지였던 진도와 지도 등과 인접해 있었고, 개항 이후 이들 섬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목포의 역할이 커지면서 유배인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유배인들은 목포를 통해서 국내외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포의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또한 목포시사가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단순히 시인묵객들을 위한 모임이라기 보다는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의 심정을 토로한 유림들의 문학적 결사체로서의 성향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목포시사는 창립 이후 목포백전회 등과 같은 이름의 시회, 즉 한시 백일장 같은 행사를 꾸준히 개최함으로서 이 지방 한문학 활동의 명맥을 계승해 왔다고 볼 수 있고,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목포시사의 규약에는 시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입사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다만 불효부모자나 불순장노자와 같은 윤리에 어긋난 패덕자들은 철저히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목포시사의 건물은 1976년 9월 30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 21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일단으로 다듬은 돌 기단위에 반듯한 기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원래의 건물은 좌우로 후면의 중앙이 벽돌로 된 것을 1979년,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붕괴위험이 있어 1995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목포시사 건물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목포에 세워져 있는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향교나 서원 건물들이 목포에는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아쉬움을 이 시사 건물을 보면서 위로 받을 수 있다. 현재 목포시사 건물 내부에서 유산정 상량문, 유산정 중수기 등 목포시사의 연혁과 관련된 글과 문인들의 작품 등 36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