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
작성일
2024-12-31
조회
68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
분 류: 비지정
명 칭: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
소 재 지: 목포시 북교동 178-1(현 참사랑요양병원)

무안감리서는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개항장 내에서의 일본영사관과의 원할한 외교 및 통상사무를 위해 설치되었다. 감리서의 신설은 1897년 8월에 외부대신(外部大臣)이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에게 감리서 설치를 청원하여, 동년 9월에 칙령 제33호로 각개항장감리관제(各開港場監理官制)를 개칭·반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안감리서의 설치이후의 주된 업무는 개항장의 조계(租界)설치, 외국과의 섭외관계 및 통상관계의 수립, 각국 영사관 부지문제 및 토지의 경매, 고하도·삼학도의 토지문제 등을 취급하였으며, 외국인들의 갖은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히 이에 대항하였다. 특히 일본상인들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시 일본낭인들이 감리서에 난입하여 갖은 행패를 부렸으나, 당시의 6대 김성규감리(金星圭監理)는 끝까지 단호하게 조선 노동자들 편에 서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였다.
감리직은 무안부윤(務安府尹)이 겸임했다.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제 1대 감리인 진상언(秦尙彦)이 발령장을 받았고, 청사는 처음에는 목포진(木浦鎭)〔만호청(萬戶廳):목포시 만호동〕를 수리하여 임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899년 지금의 신안군청 자리로 신축·이전하였다. 무안감리는 1906년 10월 제 10대 이무영감리(李懋榮監理)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무안부(務安府)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면서 폐청되었다.
현재 무안감리서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옛 사진을 통해서 당시 무안감리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옛 신안군청사의 내무과와 재무과가 있는 곳에 단층 기와집의 형태로 무안감리서가 위치하였다는 정도이다. 옛 신안군청 서고(書庫)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건물의 일부가 일제시대 건축양식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 유적의의
무안 감리서는 목포가 개항이 되자 외국 영사관에 맞서서 조선의 지방 사무 및 외교사무를 관장했던 관아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공서였다는 점에서 높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만이 강조되던 목포에 행정기관이 설치됨으로서 목포라는 도시가 행정중심의 성격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분 류: 비지정
명 칭: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
소 재 지: 목포시 북교동 178-1(현 참사랑요양병원)

무안감리서는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개항장 내에서의 일본영사관과의 원할한 외교 및 통상사무를 위해 설치되었다. 감리서의 신설은 1897년 8월에 외부대신(外部大臣)이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에게 감리서 설치를 청원하여, 동년 9월에 칙령 제33호로 각개항장감리관제(各開港場監理官制)를 개칭·반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안감리서의 설치이후의 주된 업무는 개항장의 조계(租界)설치, 외국과의 섭외관계 및 통상관계의 수립, 각국 영사관 부지문제 및 토지의 경매, 고하도·삼학도의 토지문제 등을 취급하였으며, 외국인들의 갖은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히 이에 대항하였다. 특히 일본상인들의 횡포에 대한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쟁의시 일본낭인들이 감리서에 난입하여 갖은 행패를 부렸으나, 당시의 6대 김성규감리(金星圭監理)는 끝까지 단호하게 조선 노동자들 편에 서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였다.
감리직은 무안부윤(務安府尹)이 겸임했다.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제 1대 감리인 진상언(秦尙彦)이 발령장을 받았고, 청사는 처음에는 목포진(木浦鎭)〔만호청(萬戶廳):목포시 만호동〕를 수리하여 임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899년 지금의 신안군청 자리로 신축·이전하였다. 무안감리는 1906년 10월 제 10대 이무영감리(李懋榮監理)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무안부(務安府)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면서 폐청되었다.
현재 무안감리서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옛 사진을 통해서 당시 무안감리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옛 신안군청사의 내무과와 재무과가 있는 곳에 단층 기와집의 형태로 무안감리서가 위치하였다는 정도이다. 옛 신안군청 서고(書庫)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건물의 일부가 일제시대 건축양식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 유적의의
무안 감리서는 목포가 개항이 되자 외국 영사관에 맞서서 조선의 지방 사무 및 외교사무를 관장했던 관아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공서였다는 점에서 높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만이 강조되던 목포에 행정기관이 설치됨으로서 목포라는 도시가 행정중심의 성격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