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중고교)
작성일
2024-12-31
조회
85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자중·고교)
분 류: 등록문화재 제62호
명 칭: 목포정명여학교(木浦貞明女學校)
소 재 지: 목포시 양동 86번지
설립시기: 1903년 9월 9일

◈ 개 요
1903년 9월 9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하여 동월 15일에 개교하였다.
당초에는 양동 86번지 선교회 부속건물을 가교사로 교명을 목포여학교라 했지만 실은 사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형편으로 학생이 불과 10여명이었다. 교장은 서여사(E. Straeffer)라는 미국인과 교사는 조극남(趙棘南)선생, 도합 두 사람이 정명여학교를 개척한 셈이다.
1904년 3월 초대 교장 서여사가 사임한 후 약 2년간 휴교상태에 있다가 1906년 4월 변여사(Preston)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학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11년 교사의 신축에 착수하여 그 이듬해 완공을 보았고 1914년 6월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제의 사립 목포 정명 여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학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후 교세가 더욱 확장되면서 학생수가 계속 증가하자 1922년 다시 증축 계획을 세워 3층 석조 건물을 신축하였다. 1924년 6월 신 교육령에 따라 보통과 6년, 고등과 4년제의 학교로 인가되었다. 1930년 4월 현재로 학생수는 총 10학급에 학생수 304명이었다.
◈ 유적 의의
목포정명여학교는 목포에 있어서 여자 교육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개선시켜 나간 한국 여자 중등 교육의 산 증인이기도 하며 3·1운동 당시 목포 투쟁사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운동의 주모자로부터 참가자가 대부분 정명여학교 학생들이였으며 1937년 9월 2일에는 일본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한때 폐교까지 당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교세의 발전은 1912년 1월 약 8천 원의 공사비로 석조(105평)건물을 완공한 이후부터다.
현재 당시의 교육용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석조 건물 2동(1910년대 건축)만이 옛 정명여학교의 영광을 면면히 지켜주고 있으며, 나라 잃은 슬픔과 주권 없는 겨례의 뼈아픈 쓰라림을 겪으며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 했던 선조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오래도록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관련 일화
1983년 2월 14일 선교사의 사택 천장을 수리하던 중에 3·1운동 독립선언서, 독립운동가, 결의문 그리고 그때의 일을 알리는 지하신문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포의 3·1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정명여학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는 이 자료들은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정명여학교의 영문 표기는 멕콜리기념여학교로 되어 있는데, 멕콜리(H. Mccallie, 한국명)는 당시 목포지방 근교에 있는 도서들의 사역을 담당하던 선교사로 1911년 2층으로 된 석조건물을 신축하여 정명여학교의 시설확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도 1925년 6월 11일 발생한 정명여학교 맹휴사건(부적격한 교사를 해임시켜달라는 요구를 하며 동맹휴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 대한 비하발언과 구타 등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역할이 우리 근대사회에서 갖는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분 류: 등록문화재 제62호
명 칭: 목포정명여학교(木浦貞明女學校)
소 재 지: 목포시 양동 86번지
설립시기: 1903년 9월 9일

◈ 개 요
1903년 9월 9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하여 동월 15일에 개교하였다.
당초에는 양동 86번지 선교회 부속건물을 가교사로 교명을 목포여학교라 했지만 실은 사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형편으로 학생이 불과 10여명이었다. 교장은 서여사(E. Straeffer)라는 미국인과 교사는 조극남(趙棘南)선생, 도합 두 사람이 정명여학교를 개척한 셈이다.
1904년 3월 초대 교장 서여사가 사임한 후 약 2년간 휴교상태에 있다가 1906년 4월 변여사(Preston)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학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11년 교사의 신축에 착수하여 그 이듬해 완공을 보았고 1914년 6월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제의 사립 목포 정명 여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학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후 교세가 더욱 확장되면서 학생수가 계속 증가하자 1922년 다시 증축 계획을 세워 3층 석조 건물을 신축하였다. 1924년 6월 신 교육령에 따라 보통과 6년, 고등과 4년제의 학교로 인가되었다. 1930년 4월 현재로 학생수는 총 10학급에 학생수 304명이었다.
◈ 유적 의의
목포정명여학교는 목포에 있어서 여자 교육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개선시켜 나간 한국 여자 중등 교육의 산 증인이기도 하며 3·1운동 당시 목포 투쟁사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운동의 주모자로부터 참가자가 대부분 정명여학교 학생들이였으며 1937년 9월 2일에는 일본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한때 폐교까지 당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교세의 발전은 1912년 1월 약 8천 원의 공사비로 석조(105평)건물을 완공한 이후부터다.
현재 당시의 교육용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석조 건물 2동(1910년대 건축)만이 옛 정명여학교의 영광을 면면히 지켜주고 있으며, 나라 잃은 슬픔과 주권 없는 겨례의 뼈아픈 쓰라림을 겪으며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 했던 선조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오래도록 알리기 위한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관련 일화
1983년 2월 14일 선교사의 사택 천장을 수리하던 중에 3·1운동 독립선언서, 독립운동가, 결의문 그리고 그때의 일을 알리는 지하신문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포의 3·1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정명여학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는 이 자료들은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정명여학교의 영문 표기는 멕콜리기념여학교로 되어 있는데, 멕콜리(H. Mccallie, 한국명)는 당시 목포지방 근교에 있는 도서들의 사역을 담당하던 선교사로 1911년 2층으로 된 석조건물을 신축하여 정명여학교의 시설확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도 1925년 6월 11일 발생한 정명여학교 맹휴사건(부적격한 교사를 해임시켜달라는 요구를 하며 동맹휴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 대한 비하발언과 구타 등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역할이 우리 근대사회에서 갖는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