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동본원사 목포별원
작성일
2024-12-31
조회
65
동본원사 목포별원(東本願寺 木浦別院)
분 류: 등록문화재 제340호
명 칭: 동본원사 목포별원(東本願寺 木浦別院)
소 재 지: 목포시 무안동 2가 4
설치시기: 일제시대

◈ 개 요
얼마전까지 목포중앙교회가 사용했고 현재는 오거리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목포의 첫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이다. 정식명칭은 진종(眞宗) 대곡파(大谷派) 동본원사였다.
동본원사 별원은 1898년 4월에 다 허물어진 바라크 빈집에 세운 목포의 첫 불교사원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부산, 인천 등 전 개항지에서의 선례에 따라 별원에 목포심상고등소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목포 최초의 일본인 소학교를 정식으로 운영하였으며 이때 영사관 서쪽편에 다시 임시 사원을 건립하였다. 소학교의 운영은 거류민수가 늘어나고 학생 수도 67명에 달해 1902년 1월 1일부터 거류민회에 넘어갔다. 1904년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수하고 1905년 11월에 목조 단층 사원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에 1907년 동본원사 본산에서는 목포지원을 목포별원으로 승격시켰다.
◈ 유적 의의
현재 남아 있는 석조건물이 정확하게 언제 신축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인들의 기록인 목포부사에는 '당우 개축에 관한 논의가 있어 일이 진행되었으나 유번의 경질이 있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글이 쓰여진 시기가 1930년이므로, 아마도 그 이후 1930년대 초반에 석조건물로 신축된 것으로 생각된다.
장방형의 단층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정면 중앙에는 출입구로서 별도로 넓게 포치를 두었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사용한 팔작지붕이며, 포치부분은 단을 낮게 처리한 원형의 장식적 지붕을 설치하였다. 벽체는 정형으로 다듬은 석조 갓기둥으로 장식하였고 그 상부에는 주두까지 두었다. 한편 창호 위아래로는 돌출된 수평띠를 건물전체에 둘렀다. 창호는 오르내리창을 쌍으로 설치한 수직창이다.
해방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현 목포중앙교회에서 1957년 3월 17일 건물부지를 계약하여 동년 7월 1일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간이 교회가 된 이색적인 약력을 지닌 이 건물은 목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가는 답사코스이기도 하다.
한편 교회 건물의 앞마당에는 이곳이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을 갈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에 경찰의 강제진압을 피하는 목포시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던 곳이었음을 알리는 기념석이 세워져있다.
분 류: 등록문화재 제340호
명 칭: 동본원사 목포별원(東本願寺 木浦別院)
소 재 지: 목포시 무안동 2가 4
설치시기: 일제시대

◈ 개 요
얼마전까지 목포중앙교회가 사용했고 현재는 오거리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목포의 첫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이다. 정식명칭은 진종(眞宗) 대곡파(大谷派) 동본원사였다.
동본원사 별원은 1898년 4월에 다 허물어진 바라크 빈집에 세운 목포의 첫 불교사원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부산, 인천 등 전 개항지에서의 선례에 따라 별원에 목포심상고등소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목포 최초의 일본인 소학교를 정식으로 운영하였으며 이때 영사관 서쪽편에 다시 임시 사원을 건립하였다. 소학교의 운영은 거류민수가 늘어나고 학생 수도 67명에 달해 1902년 1월 1일부터 거류민회에 넘어갔다. 1904년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수하고 1905년 11월에 목조 단층 사원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에 1907년 동본원사 본산에서는 목포지원을 목포별원으로 승격시켰다.
◈ 유적 의의
현재 남아 있는 석조건물이 정확하게 언제 신축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인들의 기록인 목포부사에는 '당우 개축에 관한 논의가 있어 일이 진행되었으나 유번의 경질이 있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글이 쓰여진 시기가 1930년이므로, 아마도 그 이후 1930년대 초반에 석조건물로 신축된 것으로 생각된다.
장방형의 단층건물로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정면 중앙에는 출입구로서 별도로 넓게 포치를 두었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사용한 팔작지붕이며, 포치부분은 단을 낮게 처리한 원형의 장식적 지붕을 설치하였다. 벽체는 정형으로 다듬은 석조 갓기둥으로 장식하였고 그 상부에는 주두까지 두었다. 한편 창호 위아래로는 돌출된 수평띠를 건물전체에 둘렀다. 창호는 오르내리창을 쌍으로 설치한 수직창이다.
해방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현 목포중앙교회에서 1957년 3월 17일 건물부지를 계약하여 동년 7월 1일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간이 교회가 된 이색적인 약력을 지닌 이 건물은 목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가는 답사코스이기도 하다.
한편 교회 건물의 앞마당에는 이곳이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을 갈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에 경찰의 강제진압을 피하는 목포시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던 곳이었음을 알리는 기념석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