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작성일
2024-12-31
조회
79
■ 고하도 개요
목포 남서쪽으로 1.9㎞ 거리에 있는 길게 늘어진 섬으로 지질은 대부분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졌으며, 섬 전체가 높이 80m 이하의 낮은 산지이다. 목포시를 마주보는 북동사면은 단애를 이루면서 해안에 이어져 멋진 절경을 과시한다. 섬의 남쪽에는 농경지가 많고, 만 주변은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제방을 막아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된다. 취락은 섬 남부의 농경지 부근에 집중하여 분포하며,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항한다.
역사의 땅 고하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주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명칭이 붙게 되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로 나온다. 비하도(悲霞島), 고하도(孤霞島) 등으로도 불리었다.
이곳에는 1597년 이순신장군이 진을 쳤던 흔적과 함께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가 전해오고 있고, 일제시대 이곳에서 최초로 육지면 면화가 재배된 것으로 기념하기 위한 비가 남아있다.
교통안내
현재는 연육되어, 목포 북항쪽에서 목포대교를 건너가면 바로 갈 수 있다.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분 류: 도지정기념물
명 칭: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李忠武公遺蹟 高下島鎭址
소 재 지: 목포시 충무동 고하도 내 (큰산-칼바위-말바위 일대)
지정년도: 1974년 9월 24일
지정번호: 제10호

고하도는 지형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섬이라 하여 용머리, 또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하여 병풍도·병풍바위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더욱이 영산강 하구와 목포 앞바다에 연접되어 내륙과 서남해를 연결하고 있어서 마치 영산강의 빗장처럼 가로 놓여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후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가, 이듬해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다시 진을 옮겨 갈 때까지 주둔하였던 곳으로 당시의 진영(鎭營)터와 성터가 남아 있다.
진영이 있었던 곳은 속칭 꿀당굴, 불당골이라 부르는 지점으로 서북풍을 막을 수 있는 큰 산밑의 남쪽산록에 위치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진성(鎭城)의 축조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의 목재를 가져다가 진영과 군량창고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인근 일대의 군수와 현감, 그리고 주민들에 의해 규합된 군량미의 비축은 무려 486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성터는 현지 충무공유허비각이 있는 당산 뒷편의 뫼 봉산→큰산→말바위→칼바위→성안골로 이어지는 지형을 에워싼 긴 타원형의 석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축성(築城)은 천연의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요새로서의 구실을 하거나, 혹은 큰 숲을 이용하여 매복할 수 있는 석성의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칼바위에서 말바위가 있는 지역은 큰 바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위와 바위사 이에 작은 돌로 쌓은 높이 2m, 폭 1m의 석성이 약 300m 정도가 듬성듬성 남아 있다. 칼바위 아래의 민가의 담장과 축대는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어 더욱 옛 고하도진성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목포 남서쪽으로 1.9㎞ 거리에 있는 길게 늘어진 섬으로 지질은 대부분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졌으며, 섬 전체가 높이 80m 이하의 낮은 산지이다. 목포시를 마주보는 북동사면은 단애를 이루면서 해안에 이어져 멋진 절경을 과시한다. 섬의 남쪽에는 농경지가 많고, 만 주변은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제방을 막아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된다. 취락은 섬 남부의 농경지 부근에 집중하여 분포하며, 정기여객선이 매일 운항한다.
역사의 땅 고하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주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명칭이 붙게 되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로 나온다. 비하도(悲霞島), 고하도(孤霞島) 등으로도 불리었다.
이곳에는 1597년 이순신장군이 진을 쳤던 흔적과 함께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가 전해오고 있고, 일제시대 이곳에서 최초로 육지면 면화가 재배된 것으로 기념하기 위한 비가 남아있다.
교통안내
현재는 연육되어, 목포 북항쪽에서 목포대교를 건너가면 바로 갈 수 있다.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분 류: 도지정기념물
명 칭: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李忠武公遺蹟 高下島鎭址
소 재 지: 목포시 충무동 고하도 내 (큰산-칼바위-말바위 일대)
지정년도: 1974년 9월 24일
지정번호: 제10호

고하도는 지형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섬이라 하여 용머리, 또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하여 병풍도·병풍바위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더욱이 영산강 하구와 목포 앞바다에 연접되어 내륙과 서남해를 연결하고 있어서 마치 영산강의 빗장처럼 가로 놓여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후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가, 이듬해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다시 진을 옮겨 갈 때까지 주둔하였던 곳으로 당시의 진영(鎭營)터와 성터가 남아 있다.
진영이 있었던 곳은 속칭 꿀당굴, 불당골이라 부르는 지점으로 서북풍을 막을 수 있는 큰 산밑의 남쪽산록에 위치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진성(鎭城)의 축조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의 목재를 가져다가 진영과 군량창고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인근 일대의 군수와 현감, 그리고 주민들에 의해 규합된 군량미의 비축은 무려 486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성터는 현지 충무공유허비각이 있는 당산 뒷편의 뫼 봉산→큰산→말바위→칼바위→성안골로 이어지는 지형을 에워싼 긴 타원형의 석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축성(築城)은 천연의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요새로서의 구실을 하거나, 혹은 큰 숲을 이용하여 매복할 수 있는 석성의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칼바위에서 말바위가 있는 지역은 큰 바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위와 바위사 이에 작은 돌로 쌓은 높이 2m, 폭 1m의 석성이 약 300m 정도가 듬성듬성 남아 있다. 칼바위 아래의 민가의 담장과 축대는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어 더욱 옛 고하도진성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