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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이야기 [2022-08-24 04:38:40]
작성일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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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이야기
‘민족자본은행’으로서 지역유지들의 활동공간이 되다
편집부
목포의 금융기관은 1898년 10월 1일 일본의 주식회사 제일은행(第一銀行) 목포출장소 설치가 처음이다.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된 지 꼭 1년만의 일이다. 이후 1906년 9월 십팔은행(十八銀行) 목포지점, 나가사키저축은행 대리점, 1909년 11월 한국은행(나중에 조선은행으로 개칭)목포출장소가 설치됐으며, 일본인 소액상업자금 금융기관으로 목포금융조합 등이 있었고, 금융관계회사로는 수탈기관으로 악명 높았던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1920), 목포신탁회사(1922) 등이 있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은행을 합방 뒤 완전히 장악했고, 그때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했다. 즉, 일본인에게는 저리로 대출을 적극적으로 해주었는데 조선 사람들에게는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조선인은 주변에 있는 일본인에게 고리대금으로 사채를 빌려야 했다.
현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 설립연도는 1926년
호남은행은 1920년 10월 2일에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은행이다. 호남부호 현준호(玄俊鎬), 김상섭(金商燮), 김병로(金炳魯) 등이 당시 돈 150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하였으며 본점은 광주에 두었다. 호남은행 대부분의 고객이 한국인이었다. 1924년 말 전남 소재의 은행들의 한국인 대출 점유율을 살펴보면 조선은행 3.0%, 식산은행 48.2%, 십팔은행 21.9%인 반면, 호남은행은 81.5%에 이른다.
▲ 호남은행 목포지점 상량 (1926년 7월 29일 건축됐음을 보여준다.)
1933년 7월 동래은행(東萊銀行)을 흡수, 합병하게 됨으로써 영업지역을 경상남도 지역으로까지 확대, 동래·거창·영광·담양 등지에까지 지점을 설치하고 자본금을 200만원으로 늘려 대은행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이 1928년에 신은행령을 발포하고 민족계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인 자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식민지금융정책을 강화하면서 민족계 은행의 통합을 강요하였는데, 이같은 식민지 지배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독자운영을 고수하다가 총독부가 일본인 자본의 참가를 거역하고 일본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일은행(東一銀行)과의 통합을 강요한 결과, 마침내 1942년 4월 30일에 합병당하게 되었다. 1942년 9월 민족자본은행들은 주식회사 조흥은행을 설립하여 순수한 민족계은행으로 그 계보를 이었다. 2006년 4월 1일 (주)신한은행으로 통합 출범하였다.
유지들이 목포고보 설립 등 지역현안을 논의하던 장소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 2층에는 목포의 조선인 상공인들로 구성된 상공동지회 사무실이 있었다. 상공동지회(회장 김용진)는 전등료(전기요금) 감하운동을 주도하였고, 1931년 목포청년동맹이 주최한 제1회 목포시민운동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또 지역 유지들이 목포고보 설립 등 지역현안을 논의했던 장소였다. 목포고보 설립 기성운동은 목포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목포에 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으로 목포, 무안, 진도, 제주, 강진, 해남, 장흥, 영암, 영광, 완도 등 1부(府) 10군에 기성위원을 선출하여 기금모금을 진행하였고, 1936년 4월 24일 호남은행 목포지점에서 각군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한 이후 지속되었다.
현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은 1926년 지어진 목포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의 하나다. 근대 개항 도시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로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아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湖南銀行 木浦支店’ 浦자의 <′>이 빠진 사연
지금의 정문은 현대적 간판이 걸려 있지만 그 안은 예전에 음각된 '주식회사 조흥은행 목포지점(株式會社 朝興銀行木浦支店)'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 '조흥' 두 글자는 원래 '호남'이었던 것을 후에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글자 중 '浦'자의 < ′> 1획이 빠져 있다. 그 사유에는 설립자 현준호 선생(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조부)이 '일제로부터 우리가 독립하면 찍겠다.'라는 설과 '목포지점이 자리잡고 번창하며 찍겠다.' 등의 여러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아직까지 그 1획은 빈 그대로 남아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삼성·현대家와의 인연
호남은행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30년 호남은행 두취(두취; 은행장)을 역임한 현준호(1889∼미상)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조부이다. 현준호의 손녀 현정은 현대그룹 정몽헌의 배우자가 된다. 그런가 하면 현준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면서 회계 업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김신석을 발탁해서 자신이 운영하던 호남은행으로 불러왔다. 김신석이 호남은행 목포지점장으로 있을 때 낳은 딸 김윤남(1924년 목포 출생)이 홍진기와 결혼하여 홍라희와 홍석현 등을 낳았는데, 홍라희는 삼성그룹 이병철의 3남이자 삼성의 후계자가 된 이건희와 결혼하였다.
이처럼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 그룹인 삼성과 현대가와도 연결돼 있는 점이 흥미로운데, 도올 김용옥 선생과도 인연도 눈길을 끈다.
도올 김용옥의 조부인 김영학은 동복군수를 지낸 이후 목포 북교동에 거주하며 호남은행 설립에 참여했다고 한다. 김영학이 목포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당시 신문에서도 확인된다. 1920년 5월 9일 창립총회 시 김영학이 평의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청년회관 건축 의연금으로 이백원을 냈고, 1923년 목포 수재(水災) 당시에도 의연금을 낸 사실이 보도되었다.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개관 준비중
근대 개항도시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로 순수 민족계 은행으로서의 역사성 및 사회성이 인정되어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2021년 4월 목포문화원이 이전하고 현재는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개관을 앞두고 준비에 한창이다.
<목포문화 제1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