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료실
근대도시 생활문화사 연구방법론의 개척(서평)
작성일
2025-01-02
조회
72
서평
근대도시 생활문화사 연구 방법론의 개척
(고석규, 2004,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서울대 출판부)
박찬승(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아마도 1997년 봄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목포 개항 100주년을 맞아 〈목포개항백년사〉를 준비하고 있던 고석규교수와 평자는, 향토사가로서 목포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정섭 선생을 모시고 목포시내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 때 우리가 돌아본 곳은 일본영사관과 그 뒤에 있던 일제 말기의 대피소로 파놓은 토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일본인 심상소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달초등학교, 유달산 입구의 일본인 대부호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살던 이훈동가의 일본식 정원, 유달산 자락의 조선인 빈민촌이었던 온금동, 옛날의 만석군이었던 김성규가와 문재철가, 기생학교인 목포권번이 있던 집, 1925년에 지어진 목포 청년회관 건물이었던 현 목포제일교회, 옛 무안감리서 자리인 신안군청, 유진 벨이 지은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자 목포 3․1운동의 준비장소였던 양동교회, 역시 유진 벨이 지은 정명여학교 등이었다. 이날 답사는 3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그 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중에 몇 군데는 이미 다녀본 곳이었지만, 이렇게 목포 근대사의 현장을 모두 다녀보고 나니 목포의 근대사가 아직도 살아 있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날은 목포만큼 근대사의 현장이 잘 남아 있는 곳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 날이었다. 이후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회사학회 회원들이 목포에 답사를 왔을 때 그들을 그 길로 안내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후 ‘목포 역사의 길’을 고석규교수와 함께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날의 답사 덕분이었다.
<목포개항백년사〉가 나온 뒤 평자는 목포에 대한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였고, 몇 해 뒤 목포를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고교수는 이후에도 목포의 역사에 계속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였고, 마침내 이를 책으로 펴냈다. 〈근대 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를 읽으면서 평자는 먼저 고교수가 평소에 도시사를 문화론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교수는 목포대에 부임하기 이전에 이미 서울시립대의 서울학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이미 서울의 도시사를 문화론적으로 접근하여 정리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목포에 내려온 뒤 이를 목포의 도시사에 적용해 이번에 그 성과를 낸 것이다.
고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의 소재가 도시의 대중, 도시의 문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이른바 민중사관에서 역사속에서의 민중을 찾으려 한 노력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 대신 역사 해석에서 소외되어 온 ‘대중’에 주목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설정된 민중 대신, 역사를 만드는 주체라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이에 적응하려 했던 대중들의 생활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문화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 고교수는 도시의 역사를 도시의 경관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의 역사를 도시의 경관과 결합시켜 보고자 했다. 그는 도시의 역사는 도시라는 공간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따라서 도시의 역사는 그 공간에 제약당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 흔적을 도시의 공간에 남기게 된다고 본다. 그 공간을 그는 경관(landscape)이라고 부른다. 사실 근대 역사학의 출발 이후 역사학에서 공간의 문제는 매우 경시되어 왔다. 동양의 역사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온 지리(또는 역사지리)의 문제는 서양의 근대 역사학이 들어온 이후 홀시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의 사학과에서 역사지리학이 개설된 학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수는 과거 역사지리학의 문제의식을 좀더 넓은 현대적 개념인 ‘경관’의 문제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는 한국 근대 도시의 발달은 식민지시대에 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개항장 도시였던 목포와 같은 경우에는 일본인들의 거리와 조선인들의 거리가 갖는 차별성, 즉 공간의 이중성이 뚜렷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즉 한국근대 도시는 경관 상에서 ‘이중성’ 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의 연구 방법론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저자가 한국의 근대 도시의 대중문화를 ‘신파성’ 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신파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근대도시에 살던 조선인 대중들, 특히 중산층의 경우 도시가 보여주는 근대성에 매몰되면서 저항보다는 순응과 타협, 그리고 근대성의 향유를 더 즐겼다고 본다. 즉 근대도시의 식민성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과 순응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도시민들의 대중문화, 예를 들어 대중가요나 영화, 연극 등에서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신파성’ 이라고 불렀다. 한국 근대 도시의 문화는 이러한 ‘신파성’ 위에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그 연구방법론에서 도시의 대중, 도시 경관의 이중성, 도시 대중문화의 신파성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시사 연구의 방법론은 매우 참신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도시경관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서울 도시사 연구자들에 의해 간간이 언급되었고, 식민지시기 대중문화의 신파성에 대해서도 문학 혹은 문화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된 바 있지만, 이를 지방의 도시사와 도시문화에 적용하여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2
이제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은 목포근현대사를 생활문화사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제1부 ‘목포 도시 발달과 공간의 이중성’ 은 ‘목포진과 목포사람들-개항전의 목포’, ‘개항장 목포의 초기도시화 과정’, ‘일제강점기 대도회 목포의 성장과 선일인차별’, ‘거듭나는 현대도시 목포의 반세기’ 등으로 짜여져 있다. 즉 개항 이전의 목포의 모습과, 개항 이후 목포사 도시화되는 초기의 모습, 그리고 일제 하에서 목포의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 공간이 확장되는 가운데 도시 개발에 있어 일본인, 조선인 간의 차별, 그리고 해방 이후 목포 도시발달의 침체상과 도약의 몸짓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는 결국 근현대 목포의 도시 발달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발달사는 주로 도시 경관의 변천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도시 경관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초기도시화 과정에서 ‘이중 공간의 형성’ 문제이다. 저자는 도시계획 도로포장과 가로등 과 같은 거리시설, 상하수도 시설 등에서 일본인 동네와 조선인 동네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목포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의 발언 내용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동네를 구별해 보면, 조선인 토지소유는 80만평, 일본인 소유는 40만평이고, 인구별로 보면 조선인은 5만, 일본인은 8천밖에 안 되니 이러한 통계로 보면 조선인 2,900명에 가로등 하나, 일본인 580명에 가로등 하나란 차별적 시설”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 동네의 즐비한 고루거각과 대비되는 조선인 동네의 빈민굴의 모습을 당시 신문기사와 박화성의 하수도공사와 같은 소설 등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930년대 목포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1935년 인구는 6만을 돌파했고, 인구증가율은 전국 최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포 전성기에 조선인들 가운데 중산층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꾸준히 늘어갔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가 만들어져 갔으며, 목포의 중심지가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가 만나는 접점인 ‘오거리’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폭팔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주택문제, 교통문제, 상하수도 문제 등의 심각화,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시구역의 확장, 갯벌의 간척, 그리고 이를 통한 택지조성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잘 정리하고 있다.
제2부 ‘목포사람들의 삶과 문화’에서 저자는 목포의 대중문화 변천사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한말 개혁사상가이자 만석군으로 목포의 두 번째 부호였던 김성ㄱ의 아들들인 극작가 김우진과 청년운동가 김철진을 통해 당시 목포 도시 1세대 지식인들의 삶과 고민을 정리하였다. 김성규와 김우진 사이의 갈등이 근대문화의 수용을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점, 사회주의자에서 도평의회 의원까지 갈짓자 행보를 보였던 김철진의 자기갈등은 부르주아적인 지식인이 보였던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1930년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을 통해서 그는 당시 목포인들의 심성, 즉 식민지배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자기한탄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시 대중들의 분위기는 또 다른 한편에선 유흥과 환락을 탐닉하면서 자기 자신들을 잊으려 했던 타락적인 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목포의 대중문화의 성격은 식민성을 애써 보지 않고 근대성에 안주하면서 이를 탐닉하려 했던 목포 도시민들의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유지층이 중심이 되었던 목포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절하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당시 목포의 유지층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자는 '목포공동제‘적인 의식보다는 자기 자식만 타지의 좋은 학교에 보내면 된다고 하는 이기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근대 이후 목포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교통수단을 들고 있다. 호남선 철도, 영산강 뱃길,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가 목포 사람들의 활동 반경을 어떻게 넓혀주었는지, 그리고 호남선 철도와 같은 경우 이를 건설하려던 조선인들의 노력이 어떻게 좌절되고 일본인들이 쌀 수탈을 위해 얼마나 서둘러 이 철도를 건설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이 철도의 복선화가 호남푸대접으로 인해 30년 이상이 걸린 사정 등을 잘 정리하고 있다.
또 저자는 목포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였던 물(상수도)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겠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목포는 만성적인 상수도 부족 지역이었으며, 시민들의 물 긷는 행렬이 낯설지 않은 동네였다. 또 전국에서 가장 더러운 물을 가장 비싼 값에 먹는 도시라고 널리 알려져 왔다. 저자는 목포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이후에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개항 이후부터 최근까지 100여년의 물과의 투쟁사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목포인들이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먼저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저자의 이 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목포라는 한 개항장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 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공간과 문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의도는 책의 내용에서 잘 관철되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그 몇 가지를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이 책에서 목포도시사에서의 공간, 특히 경관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의 문제는 비교적 언급이 된 것 같으나, 경관 변화의 문제는 그리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은 것 같다. 도시 경관은 역시 건물을 중심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리와 스카이라인의 모습은 모두 건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도시 경관을 말할 때에는 역시 도시 건축이 어떠한 변화를 보여왔는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개항 이후 일본인 거리에 일본인들의 가옥과 상점, 그리고 영사관 건물이 들어설 때의 모습을 사진으로 제시하거나 글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조선인 거리의 모습도 역시 상점과 가옥들의 모습을 중심으로 글로 묘사하고 이를 일본인 거리의 그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었다. 또 일제시기에 들어선 이후 르네상스 양식의 동양척식회사 건물, 일본인 심상소학교 건물, 동본원사와 같은 일본인 사찰 건물 등이 들어설 때의 도시경관의 변화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인 거리에도 청년회관,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건물과 석조건물들이 들어서는 과정과 그로 인한 경관 변화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목포의 도시 경관은 크게 변해 왔다. 온금동, 대성동 등을 중심으로 한 빈민촌의 형성, 목포역과 오거리를 중심으로 한 중심지의 변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 유달산 중턱에 있던 초가집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에 의해 철거되면서 유달산의 모습이 변화한 것, 도시 변경지역에 고층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도시 경관이 크게 변화한 것, 그리고 하당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도시의 규모와 중심지가 크게 변화한 것, 특히 100년로가 뚫리면서 도심지의 가로망이 완전히 바뀐 것 등을 서술에 포함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리고 도시 공간의 확장과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간척지의 확대는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보다 자세히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둘째, 도시공간의 이중성을 이 책에서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일본인 거리, 일본인 주택가, 일본인 상점, 일본인들의 생활과 문화 등 일본인들에 대한 언급이 적은 점이 아쉽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목포의 인구 가운데 조선인보다 일본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초기 목포 도시사에서 일본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계지 시대의 일본인 거리, 그리고 1910년 이후 일본인 거리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목포라는 개항장도시가 갖는 식민성의 모습을 일본인 거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1만명 정도의 일본인들이 목포를 떠나가던 모습과 그 이후 이 지역의 적산이 어떻게, 누구에게 불하되었는지는 확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동본원사 건물이 어떻게 개신교회로 넘어갔는지, 일본헌병대장의 건물이 어떻게 오늘의 고급음식점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목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목포의 문화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요정과 유곽 등 유흥가는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었으나, 영화관 같은 문화의 중심지는 어떠했는지 다소 소략하다는 느낌이다. 또 청년회관은 적어도 1920년대에는 목포의 사회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중심지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소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목포의 미술인과 음악인, 그리고 문학청년들이 오거리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어가던 부분도 소개에서 빠진 점이 아쉽다. 특히 박화성, 김지하, 김현 등 목포가 낳은 문학인들에 대한 소개는 조금 더 자세하게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박화성은 일제시기 동반자 작가 시절 목포의 모습을 그린 소설을 많이 썼는데, ‘하수도공사’만 소개되고 ‘청년회관’ 등의 작품은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위와 같은 아쉬움들이 있지만, 이 책은 많은 미덕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지도나 사진과 같은 자료들이 있다. 또 한국근대사에서 압제와 저항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회색지대에 있던 도시의 대중들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도시, 특히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이와 같은 생활문화사를 쓴 것은 처음이라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앞으로 이책은 목포 도시민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지방화를 지향하는 작금의 시대에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생활문화사를 중심으로 한 도시사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근대도시 생활문화사 연구 방법론의 개척
(고석규, 2004,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서울대 출판부)
박찬승(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아마도 1997년 봄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목포 개항 100주년을 맞아 〈목포개항백년사〉를 준비하고 있던 고석규교수와 평자는, 향토사가로서 목포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정섭 선생을 모시고 목포시내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 때 우리가 돌아본 곳은 일본영사관과 그 뒤에 있던 일제 말기의 대피소로 파놓은 토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일본인 심상소학교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달초등학교, 유달산 입구의 일본인 대부호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살던 이훈동가의 일본식 정원, 유달산 자락의 조선인 빈민촌이었던 온금동, 옛날의 만석군이었던 김성규가와 문재철가, 기생학교인 목포권번이 있던 집, 1925년에 지어진 목포 청년회관 건물이었던 현 목포제일교회, 옛 무안감리서 자리인 신안군청, 유진 벨이 지은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자 목포 3․1운동의 준비장소였던 양동교회, 역시 유진 벨이 지은 정명여학교 등이었다. 이날 답사는 3시간 넘게 진행되었는데, 그 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중에 몇 군데는 이미 다녀본 곳이었지만, 이렇게 목포 근대사의 현장을 모두 다녀보고 나니 목포의 근대사가 아직도 살아 있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날은 목포만큼 근대사의 현장이 잘 남아 있는 곳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 날이었다. 이후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회사학회 회원들이 목포에 답사를 왔을 때 그들을 그 길로 안내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후 ‘목포 역사의 길’을 고석규교수와 함께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날의 답사 덕분이었다.
<목포개항백년사〉가 나온 뒤 평자는 목포에 대한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였고, 몇 해 뒤 목포를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고교수는 이후에도 목포의 역사에 계속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였고, 마침내 이를 책으로 펴냈다. 〈근대 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를 읽으면서 평자는 먼저 고교수가 평소에 도시사를 문화론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교수는 목포대에 부임하기 이전에 이미 서울시립대의 서울학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이미 서울의 도시사를 문화론적으로 접근하여 정리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목포에 내려온 뒤 이를 목포의 도시사에 적용해 이번에 그 성과를 낸 것이다.
고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의 소재가 도시의 대중, 도시의 문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이른바 민중사관에서 역사속에서의 민중을 찾으려 한 노력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 대신 역사 해석에서 소외되어 온 ‘대중’에 주목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설정된 민중 대신, 역사를 만드는 주체라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이에 적응하려 했던 대중들의 생활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문화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 고교수는 도시의 역사를 도시의 경관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의 역사를 도시의 경관과 결합시켜 보고자 했다. 그는 도시의 역사는 도시라는 공간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따라서 도시의 역사는 그 공간에 제약당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 흔적을 도시의 공간에 남기게 된다고 본다. 그 공간을 그는 경관(landscape)이라고 부른다. 사실 근대 역사학의 출발 이후 역사학에서 공간의 문제는 매우 경시되어 왔다. 동양의 역사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온 지리(또는 역사지리)의 문제는 서양의 근대 역사학이 들어온 이후 홀시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의 사학과에서 역사지리학이 개설된 학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수는 과거 역사지리학의 문제의식을 좀더 넓은 현대적 개념인 ‘경관’의 문제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는 한국 근대 도시의 발달은 식민지시대에 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개항장 도시였던 목포와 같은 경우에는 일본인들의 거리와 조선인들의 거리가 갖는 차별성, 즉 공간의 이중성이 뚜렷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즉 한국근대 도시는 경관 상에서 ‘이중성’ 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의 연구 방법론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저자가 한국의 근대 도시의 대중문화를 ‘신파성’ 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신파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근대도시에 살던 조선인 대중들, 특히 중산층의 경우 도시가 보여주는 근대성에 매몰되면서 저항보다는 순응과 타협, 그리고 근대성의 향유를 더 즐겼다고 본다. 즉 근대도시의 식민성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과 순응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도시민들의 대중문화, 예를 들어 대중가요나 영화, 연극 등에서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신파성’ 이라고 불렀다. 한국 근대 도시의 문화는 이러한 ‘신파성’ 위에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그 연구방법론에서 도시의 대중, 도시 경관의 이중성, 도시 대중문화의 신파성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시사 연구의 방법론은 매우 참신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도시경관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서울 도시사 연구자들에 의해 간간이 언급되었고, 식민지시기 대중문화의 신파성에 대해서도 문학 혹은 문화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된 바 있지만, 이를 지방의 도시사와 도시문화에 적용하여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2
이제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은 목포근현대사를 생활문화사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제1부 ‘목포 도시 발달과 공간의 이중성’ 은 ‘목포진과 목포사람들-개항전의 목포’, ‘개항장 목포의 초기도시화 과정’, ‘일제강점기 대도회 목포의 성장과 선일인차별’, ‘거듭나는 현대도시 목포의 반세기’ 등으로 짜여져 있다. 즉 개항 이전의 목포의 모습과, 개항 이후 목포사 도시화되는 초기의 모습, 그리고 일제 하에서 목포의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 공간이 확장되는 가운데 도시 개발에 있어 일본인, 조선인 간의 차별, 그리고 해방 이후 목포 도시발달의 침체상과 도약의 몸짓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는 결국 근현대 목포의 도시 발달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발달사는 주로 도시 경관의 변천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도시 경관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초기도시화 과정에서 ‘이중 공간의 형성’ 문제이다. 저자는 도시계획 도로포장과 가로등 과 같은 거리시설, 상하수도 시설 등에서 일본인 동네와 조선인 동네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목포부회에서의 조선인 의원의 발언 내용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동네를 구별해 보면, 조선인 토지소유는 80만평, 일본인 소유는 40만평이고, 인구별로 보면 조선인은 5만, 일본인은 8천밖에 안 되니 이러한 통계로 보면 조선인 2,900명에 가로등 하나, 일본인 580명에 가로등 하나란 차별적 시설”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 동네의 즐비한 고루거각과 대비되는 조선인 동네의 빈민굴의 모습을 당시 신문기사와 박화성의 하수도공사와 같은 소설 등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930년대 목포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1935년 인구는 6만을 돌파했고, 인구증가율은 전국 최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포 전성기에 조선인들 가운데 중산층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꾸준히 늘어갔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가 만들어져 갔으며, 목포의 중심지가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가 만나는 접점인 ‘오거리’ 지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폭팔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주택문제, 교통문제, 상하수도 문제 등의 심각화,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시구역의 확장, 갯벌의 간척, 그리고 이를 통한 택지조성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잘 정리하고 있다.
제2부 ‘목포사람들의 삶과 문화’에서 저자는 목포의 대중문화 변천사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한말 개혁사상가이자 만석군으로 목포의 두 번째 부호였던 김성ㄱ의 아들들인 극작가 김우진과 청년운동가 김철진을 통해 당시 목포 도시 1세대 지식인들의 삶과 고민을 정리하였다. 김성규와 김우진 사이의 갈등이 근대문화의 수용을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점, 사회주의자에서 도평의회 의원까지 갈짓자 행보를 보였던 김철진의 자기갈등은 부르주아적인 지식인이 보였던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1930년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을 통해서 그는 당시 목포인들의 심성, 즉 식민지배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자기한탄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시 대중들의 분위기는 또 다른 한편에선 유흥과 환락을 탐닉하면서 자기 자신들을 잊으려 했던 타락적인 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목포의 대중문화의 성격은 식민성을 애써 보지 않고 근대성에 안주하면서 이를 탐닉하려 했던 목포 도시민들의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유지층이 중심이 되었던 목포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절하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당시 목포의 유지층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자는 '목포공동제‘적인 의식보다는 자기 자식만 타지의 좋은 학교에 보내면 된다고 하는 이기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근대 이후 목포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교통수단을 들고 있다. 호남선 철도, 영산강 뱃길,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가 목포 사람들의 활동 반경을 어떻게 넓혀주었는지, 그리고 호남선 철도와 같은 경우 이를 건설하려던 조선인들의 노력이 어떻게 좌절되고 일본인들이 쌀 수탈을 위해 얼마나 서둘러 이 철도를 건설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이 철도의 복선화가 호남푸대접으로 인해 30년 이상이 걸린 사정 등을 잘 정리하고 있다.
또 저자는 목포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였던 물(상수도)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겠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목포는 만성적인 상수도 부족 지역이었으며, 시민들의 물 긷는 행렬이 낯설지 않은 동네였다. 또 전국에서 가장 더러운 물을 가장 비싼 값에 먹는 도시라고 널리 알려져 왔다. 저자는 목포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이후에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개항 이후부터 최근까지 100여년의 물과의 투쟁사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목포인들이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먼저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저자의 이 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목포라는 한 개항장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 졌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공간과 문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의도는 책의 내용에서 잘 관철되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그 몇 가지를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이 책에서 목포도시사에서의 공간, 특히 경관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의 문제는 비교적 언급이 된 것 같으나, 경관 변화의 문제는 그리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은 것 같다. 도시 경관은 역시 건물을 중심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리와 스카이라인의 모습은 모두 건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따라서 도시 경관을 말할 때에는 역시 도시 건축이 어떠한 변화를 보여왔는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개항 이후 일본인 거리에 일본인들의 가옥과 상점, 그리고 영사관 건물이 들어설 때의 모습을 사진으로 제시하거나 글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조선인 거리의 모습도 역시 상점과 가옥들의 모습을 중심으로 글로 묘사하고 이를 일본인 거리의 그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었다. 또 일제시기에 들어선 이후 르네상스 양식의 동양척식회사 건물, 일본인 심상소학교 건물, 동본원사와 같은 일본인 사찰 건물 등이 들어설 때의 도시경관의 변화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인 거리에도 청년회관,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건물과 석조건물들이 들어서는 과정과 그로 인한 경관 변화를 그릴 필요가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목포의 도시 경관은 크게 변해 왔다. 온금동, 대성동 등을 중심으로 한 빈민촌의 형성, 목포역과 오거리를 중심으로 한 중심지의 변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 유달산 중턱에 있던 초가집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에 의해 철거되면서 유달산의 모습이 변화한 것, 도시 변경지역에 고층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도시 경관이 크게 변화한 것, 그리고 하당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도시의 규모와 중심지가 크게 변화한 것, 특히 100년로가 뚫리면서 도심지의 가로망이 완전히 바뀐 것 등을 서술에 포함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리고 도시 공간의 확장과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간척지의 확대는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보다 자세히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둘째, 도시공간의 이중성을 이 책에서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일본인 거리, 일본인 주택가, 일본인 상점, 일본인들의 생활과 문화 등 일본인들에 대한 언급이 적은 점이 아쉽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목포의 인구 가운데 조선인보다 일본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초기 목포 도시사에서 일본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계지 시대의 일본인 거리, 그리고 1910년 이후 일본인 거리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목포라는 개항장도시가 갖는 식민성의 모습을 일본인 거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1만명 정도의 일본인들이 목포를 떠나가던 모습과 그 이후 이 지역의 적산이 어떻게, 누구에게 불하되었는지는 확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동본원사 건물이 어떻게 개신교회로 넘어갔는지, 일본헌병대장의 건물이 어떻게 오늘의 고급음식점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목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목포의 문화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요정과 유곽 등 유흥가는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었으나, 영화관 같은 문화의 중심지는 어떠했는지 다소 소략하다는 느낌이다. 또 청년회관은 적어도 1920년대에는 목포의 사회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중심지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소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목포의 미술인과 음악인, 그리고 문학청년들이 오거리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어가던 부분도 소개에서 빠진 점이 아쉽다. 특히 박화성, 김지하, 김현 등 목포가 낳은 문학인들에 대한 소개는 조금 더 자세하게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박화성은 일제시기 동반자 작가 시절 목포의 모습을 그린 소설을 많이 썼는데, ‘하수도공사’만 소개되고 ‘청년회관’ 등의 작품은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위와 같은 아쉬움들이 있지만, 이 책은 많은 미덕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지도나 사진과 같은 자료들이 있다. 또 한국근대사에서 압제와 저항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회색지대에 있던 도시의 대중들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도시, 특히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이와 같은 생활문화사를 쓴 것은 처음이라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앞으로 이책은 목포 도시민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지방화를 지향하는 작금의 시대에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생활문화사를 중심으로 한 도시사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